추억이 깃든 영화, 그 영화에 깃든음악
오승현 / 자유기고가
Ⅰ
오래된 영화는 추억을 불러낸다. 영화가 불러낸 추억을 반질반질 빛나게 하는 건 영화의 배경음악이다. 배경음악은 영화에 얽힌 추억에 실감을 부여하며, 더 나아가 추억을 뻥튀기한다. 귓가를 스치는 음악 소리에 홀연히 과거 한때로 돌아가게 되는 까닭이다.
Ⅱ
세대마다 다른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 여행을 떠난다. 젊은 세대는 원스(Once, 2006)의 <Falling Slowly>나 클로저(Colser, 2004)의 <the Blower’s Daughter>를 들으며 추억에 젖는다. 사실 원스나 클로저의 곡들은 더 나이든 세대가 듣기에도 거슬리지 않는다. 가볍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으면서, 때론 부드럽게 때론 격정적으로 사랑을 노래하기 때문이다. <Falling Slowly>를 부른 글렌 핸사드와 <the Blower’s Daughter>를 부른 데미안 라이스는 둘 다 아일랜드 출신이다. 그들의 노래에는 아일랜드의 한(恨) 같은 게 서려 있다. 아일랜드 특유의 슬픔이나 서정성 말이다. <the Blower’s Daughter>를 부르는 데미안 라이스의 목소리는 감정의 현(絃)을 건드려 눈물샘을 자극한다.
Ⅲ
그보다 조금 윗세대는 시네마 천국(Cinema Paradiso, 1988)이나 사랑과 영혼(Ghost, 1990)의 음악을 들으며 시간 여행을 떠난다. 사랑과 영혼의 <Unchained melody>와 영화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꼬네가 작업한 시네마 천국의 배경음악 역시 세대를 아우르는 명곡들이다. 엔니오 모리꼬네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 음악가이다. 그가 작곡한 음악들은 오랫동안 한국인의 사랑을 받아 왔다.
시네마 천국을 비롯해 Once Upon A Time In America(1984), 미션(Mission, 1986), 러브 어페어(Love Affair, 1994) 등의 OST가 대표적이다. 시네마 천국에서는 꼬마 주인공 토토의 얼굴 위로 따뜻한 선율이 흘렀고, 미션에서는 장엄하게 펼쳐지던 폭포를 배경으로 청아한 플롯 소리가 울려 퍼졌다. KBS의 <남자의 자격>을 통해 화제가 된 ‘넬라 판타지아’의 원곡이 바로 미션의 삽입곡인 ‘가브리엘 오보에’다.
Once Upon A Time In America에서는 금주법 시절의 미국 역사를 때론 서정적으로, 때론 격정적으로 표현했다. 그의 음악은 영혼을 울리는 서정적인 선율로 늘 깊은 감동을 선사해 왔다.
Ⅳ
더 나이든 세대는 닥터 지바고(Doctor Zhivago, 1965)나 러브 스토리(Love Story, 1970), 대부(1972, Mario Puzo’s The Godfather) 등 더 오래된 타임머신에 몸을 싣는다.
대부가 대체로 남성 관객들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다면, 닥터 지바고나 러브 스토리는 남녀를 가리지 않는다. 닥터 지바고는 충무로 대한극장에서 처음 상영되었다.
이 영화는 국내에서 1968년과 1978년, 1987년, 1999년에 각각 상영됐다. 대략 10년을 주기로 재개봉된 것이다. 덕분에 나이든 세대와 젊은 세대는 이 영화를 추억의 영화로 공유할 수 있다. 1969년에 최초로 영화를 본 세대와 가장 최근인 1999년에 영화를 본 세대가 말이다.
대표곡 ‘라라의 테마(Lara’s Theme)’는 시베리아 설원에서 펼쳐지는 주인공의 가슴시린 사랑을 더욱 애절하게 만든다. 러시아 혁명과 전쟁은 얄궂게도 두 사람을 갈라놓는다. 라라를 떠나보내던 지바고의 고독에 찬 허탈한 눈빛은 순백의 겨울 풍경 때문에 더욱 가슴 시리다.
사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입이 쩍 벌어지는 풍경이 줄지어 나온다. 혹한과 폭설을 뚫고 광활한 설원을 달리는 시베리아 기차, 지바고와 라라가 겨울을 보낸 우랄산맥 자락에 자리한 오두막집, 라라를 싣고 사라지는 마차를 조금이라도 더 지켜보기 위해 지바고가 하얗게 얼어붙은 창문을 닦던 장면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그 장면들 속에서 관객들은 저마다의 지바고가 되고 저마다의 라라가 된다.
Ⅴ
세대마다 다른 타임머신을 공유하지만, 추억으로 이끄는 타임머신은 세대를 뛰어넘는 공감을 자아낸다. 왜냐하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명곡들이기 때문이다.
배경음악은 말 그대로 배경일 뿐인 음악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끔 주객이 뒤바뀌기도 한다. 영화를 위해 존재하는 배경음악이 배경(背景)에서 전경(前景)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때 영화는 마치 배경음악을 위해 존재하는 배경이 되는 듯하다. 영상을 돋보이기 위해 음악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상이 음악을 도드라지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배경에서 전경으로 걸어 나오는 음악은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사무치게 그립게 만든다. 함께 영화를 봤던 사람이 그립기도 하고, 혹은 영화를 봤던 즈음의 한때가 그립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