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빛이 몸을 적시다
각양각색 봄길 행진
송은하 / 자유기고가
봄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건 몸입니다. 발이 들썩거리고 심장이 콩콩거리고 얼굴엔 화색이 돌지요. 나들이의 여왕도 봄, 소풍의 계절도 봄, 여행의 정수 역시 봄입니다. 쏟아지는 봄빛을 맞으러 걸어봅니다. 멀리 가지 않아도 좋을 봄길을 소개합니다. 지하철을 타고 갈 수 있는 각양각색 봄길 행진입니다.
하나, 서울 창경궁 꽃내음이, 흥을 돋다
하얗게 궁을 수놓은 한 떨기 꽃이 참으로 곱다. 송이의 폭이 작으니, 매화가 아니라 앵두나무 꽃이다. 빨갛게 익은 앵두 열매를 생각하면 일종의 반전이다. 온실 속에는 벌써 애발톱이 피었다. 서울 그 어느 곳보다 수려한 창경궁의 봄을 찾았다.
창경궁(서울 지하철 4호선 혜화역 4번 출구)은 사계절 내내 주목받는 궁이다. 봄에는 꽃이 예쁘고, 가을에는 단풍이 좋아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궁 내부의 온실에는 구경거리도 풍성하다. 하지만 사실 1484년(성종 15년) 당시 생존했던 세 대비(세조·덕종·예종의 왕후)의 거처로 지어진 창경궁은 일제에 의해 크게 훼손된 슬픈 이력을 가진 궁궐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로 알려져 있는 창경궁 내부의 식물원은 일제가 순종을 창덕궁에 유폐시킨 뒤 왕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동물원과 함께 지은 것이다. 그리고 1911년엔 아예 박물관, 동물원, 식물원을 통합해 ‘창경원’이란 치욕적인 이름까지 붙였다. ‘궁’이란 왕과 왕실 가족이 살며 나랏일을 보는 곳을 가리키는 말이고 ‘원’이란 사냥이나 놀이 등을 하는 곳을 말하니, 조선왕조의 권위를 실추시키기 위한 술수였던 것이다. 꽃구경도 좋지만 창경궁의 기막힌 역사에 대해 생각하며 걸어보자.
둘, 경기 양평 희망 볼랫길 다 같이 봄의 왈츠를!
해는 보드랍고 바람은 알맞다. 강은 막 깨어났고, 산은 기지개를 높이 켰다. 봄은 ‘희망 볼랫길’ 곳곳에 성큼 다가와 있었다. 양평군이 희망근로 프로젝트로 조성한 ‘볼랫길’은 지하철 중앙선 용문역에서 출발해 용문산, 추읍산을 돌아 원덕역을 잇는 산책로다. 황톳길과 도랑물, 꽃이 어우러진 이 산책로의 이름은 ‘보고 또 봐도 다시 가보고 싶은 길’이 되라는 뜻의 ‘볼랫길’.
제주 올레길이나 지리산 둘레길에 비하면 유명세도 덜하고, 코스도 적지만 그게 볼랫길만의 매력이다. 조용하고 넉넉한 풍경은 쏟아지는 하늘과 산을 다 안을 만큼 아늑하다. 걸으며 지루하지 않게 요소도 다양하게 구성했다. 흙길을 한참 걸으면 강이 나오고, 돌다리를 건너면 산길이 나온다. 등산로가 나오기 전까지는 가족 구성원 모두 쉬엄쉬엄 걷기 좋다.
아직 얼음을 다 녹이진 못했지만, 그 밑으로 가만가만 흐르는 ‘또로로또로로’ 소리도 들어보라. 그 청아한 소리 위로 ‘빠지직빠지직’ 겹쳐지는 생생한 봄의 왈츠를!
셋, 강원 춘천 문배마을날 새면 꽃 피는, 강촌에 가련다
막 잠에서 깬 강, 늘어지게 하품하는 산, 활짝 기지개 켜는 꽃까지 안 보고는 못 배기는 ‘강촌의 봄길’을 찾았다. 얼결에 통기타 매고 대학 MT에 와서 한 번 반하고, 애틋한 연인과 자전거 페달을 굴리며 영원히 반하게 되는 강촌은 많은 이들에게 ‘젊음의 이정표’로 통한다. 경춘선 지하철 개통으로 접근이 쉬워져 급행을 타고 서울 (상봉역)에서 강촌까지 한 시간이면 충분하다. 강촌역에서 문배마을까지의 걷기 여정은 두 단계다. 쉬엄쉬엄 꽃구경하는 완만한 코스 3.5㎞(강촌역-구곡폭포)와 숨이 깔딱 넘어간다는 ‘깔딱 고개’를 넘는 등산 코스 1.5㎞(구곡폭포-문배마을)다. 힘을 비축해뒀다가 산행을 완주하겠다면 강촌역 앞에서 자전거나 스쿠터를 대여해 타거나 버스를 이용해 구곡폭포 입구로 온다. 기껏 산중턱까지 올라와 내려가는 경우가 허다한데, 포기는 금물이다. 딱 한 고개만 더 넘으면 거짓말처럼 문배마을이 나타난다. 한국전쟁 당시에도 전화(戰火)가 미치지 않았다는 이 오지마을은 분지에 위치한 덕에 산을 병풍처럼 치고 그 안에 들어앉아 있다. 안 가본 사람은 결코 찾을 수 없는 곳! 지금은 단 아홉 가구만이 남아 길손을 상대로 음식점을 하고 있는데, 식당 이름이 어찌나 소박한지 주인의 성(姓)을 그대로 따 김가네, 신가네, 박가네 하는 식이다. 특히 감자전과 도토리묵은 일품 중에 일품. 음식 맛도 맛이지만, 나만의 아지트가 생긴 것 같아 돌아가는 걸음이 더뎌지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