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제5회 장려상)할아버지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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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실

등록일

2003/08/20

조회수

2268

내용

제5회 장려상
할아버지의 선물

최조태/충북 충주시 산척면 영덕리

과수원의 가을걷이를 모두 끝내고 거름까지 내고 난 요즘은 나에게 가장 한가로운 때이다. 달리 하우스 농사를 하는 것이 없으니, 내년 봄까지는 느긋하게 농사 계획을 세우거나 영농 정보를 찾아보며 지낼 수 있다. 특히 지난 겨울부터 배운 인터넷에 들어가 각종 정보를 찾아보는 일은 재미도 있을뿐더러 놀랍게 변해 가는 세상의 모습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이미 환갑이 지난 나이지만, 배우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랴.

이번 겨울에는 또 하나 자그마한 것이지만, 정말로 기쁜 계획 하나를 세울 수 있게 되었다. 다름 아닌 11월부터 받게 되는 농어민 연금이 그것이다. 나는 1940년 1월 생이어서 1995년에 시작된 농어민 연금 중에 특례노령연금에 해당되었다. 당시 55세 이상의 농어민에게 해당되는 것이었는데 나는 만으로 꼭 55세였고 5년 후 60세가 되었기 때문에 가장 많은 혜택을 볼 수 있는 조건이었다. 제대로 됐으면 올 8월부
터 연금을 수령하는 거였는데, 석 달 정도 늦어진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물론 다 나의 무지와 무관심 때문이었지만.

내가 오랜 타향살이를 접고 지금 살고 있는 고향 충주로 다시 돌아와 정착한 것은 1995년 5월이었다. 지금 살고 있는 곳도 고향 마을은 아니다. 내 고향은 충주댐 건설로 인하여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곳이 되고 말았다. 고향이 물에 잠긴 후, 나는 식솔들을 이끌고 음성으로 가서 농사를 계속하다가, 어찌 어찌된 인연으로 타국으로 이민까지 가게 되었다. 낯설고 물설은 이국 땅에서 8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을 보내고 난 후, 남은 것은 사무치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뿐이었다.

다행히 만리 타국에서 장사를 하던 큰아들 내외도 나의 뜻을 따라 귀국을 결심하였다. 동생 집에서 살고 계시던 팔순의 노모 역시 크게 반겨하셨다. 미국 생활에서 조금 모은 돈으로 고향 충주 인근에 3500평의 땅을 마련하여 우리 내외와 큰아들 내외, 노모와 손녀 등 여섯 식구가 함께 살기 시작한 것이 바로 1995년 오월이었다. 처음부터 과수원을 할 생각이었으므로 첫 해와 그 이듬해까지는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우선 집을 지어야 했고 가지고 있던 논의 절반이상을 밭으로 바꾸어야 했다. 8년만에 돌아온 우리나라는 너무도 많이 변해 있어서 새로 적응하는 데도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더구나 마을에서 꽤 떨어진 곳이다 보니 아직 마을 사람들과 얼굴도 다 익히기 전에 한 해가 훌쩍 가버리고 말았다. 간혹 텔레비전에서 국민연금이 농어촌까지 확대된다느니, 특례노령연금이니 하는 말을 듣긴 하였지만, 나처럼 금방 농어촌으로 돌아온 사람까지 해당되지는 않으려니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듬해 여름쯤으로 기억되는데, 마을 이장이 찾아와서는 내가 농어촌 특례노령연금 대상자에 해당된다고 알려주었다. 더구나 제 때에 몰라서 가입하지 않은 사람들을 특별히 배려하여 연금제도가 처음으로 시작된 95년 7월 분부터 소급해서 납부할 수 있도록 했는데, 지금 이전 것을 한꺼번에 내면 혜택을 크게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그 때까지 자동차 보험 이외에는 보험을 들어본 적도 없고 더구나 연금이라는 것은 생소한 것이었다. 이장이 설명을 해주기는 했으나, 그도 정확히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고 무조건 의무적으로 들어야하는 것이라고만 주장하였다.

뭐가 뭔지 잘 알지도 못하는 것을 무조건 들어야한다고만 하니, 은근히 화가 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사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이 이장에게 자꾸 캐어묻고 귀찮게 할 수도 않는 일이어서, 그럼 가장 적은 액수로 들어달라고 하였다. 이장은 월 6600원이 가장 적은 액수인데 그 중에 특별히 농어촌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정부에서 매월 2200원씩 보조하기 때문에 한 달에 4400원씩만 내면 된다고 하였다. 액수가 적어서 부담이 가진 않았지만, 한편으론 그까짓 4400원을 납부해서 나중에 얼마를 줄까싶어 그냥 세금 내는 셈치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는 그냥 잊어버렸다. 큰아들이 농협에 자동이체 신청을 하면서 좀더 자세히 알아본다고 하는 것도 말리면서 내가 했던 말이 지금도 기억난다.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이고, 또 정부에서 농사꾼 돈 4400원을 떼어먹기야 하려구.'그러면서 통장을 정리할 때나 아, 꼬박 꼬박 잘도 빠져나가는구나, 했지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 후 또 일년쯤이나 지났을까, 내가 내고 있는 농어민 연금을 다시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큰아들 친구 중에 한 달에 한두 번씩 토요일마다 집에 놀러오는 사람이 있었는데, 워낙 자주 놀러오다 보니까, 나도 아들처럼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직업이 국회의원 보좌관이었는데, 마침 그가 맡은 상임위가 보건복지위원회였다. 하루는 그 사람이 내게 묻는 것이었다. "아버님, 농어민연금 얼마씩 내고 계셔요? 글세, 나는 뭐, 제일 적은 액수로 내고 있지. 그런데 그게 나중에 뭘 주긴 주는 건가?"

내 대답에 그는 펄쩍 뛰는 것이었다.
"아니, 아버님. 절대로 그러시면 안돼요. 이 농어민연금은 농어민들에게 아주 큰 혜택이 돌아가는 겁니다. 더구나 특례노령연금은 열 배, 아니 스무 배도 더 혜택을 받으시는 거예요. 생각해보세요. 지금 오천 원도 안 되는 돈을 내시면 5년 후에 최소한 6∼7만원을 받으시게 되거든요. 그것도 살아 계시는 동안은 90세가 되시든 100세가 되시든 끝까지 정부에서 보장하는 거예요. 그리고 해마다 물가에 연동해서 지급되기 때문에 액수도 올라가고요. 또 유족에게까지 연금은 이어지거든요. 그러니까, 무조건 적게만 내려고 하시지 말고 가능하면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많이 내는 게 좋아요. 물론 소득에 비해서 턱없이 내면 안 되지만요."

그러면서 강원도 삼척에서 어업을 하고 있는 자기 아버지 얘기를 해주었다. 일을 할 나이가 지나서 수입은 별로 없지만, 한 달에 사만여 원씩 내고 있으며 그 돈은 매월 아버지 대신 자기가 내고 있다는 거였다. 지금은 삼척에 있는 부모님에게 한 달에 십만원 정도씩을 용돈으로 보내드리고 있지만, 몇 년 후에는 그것보다 훨씬 많은 액수의 돈이 자동적으로 아버지의 계좌에 매달 들어갈 것이라는 얘기였다. 듣고 보니 그냥 들어 넘길 말이 아니었다. 지금은 큰아들과 같이 살면서 농사를 짓고 있지만, 혹 나이 들어서 자식에게 용돈을 타 쓰게 되는 일이 안 생기리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사람일이란 알 수가 없는 거니까.

그 다음부터 마을 사람들을 만나면 연금 얘기를 물어보곤 하였다. 우리 마을은 19 가구밖에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이지만 특례노령연금 대상자가 다섯이나 되었다. 하지만 그들도 모두 나와 비슷한 경우였다. 어떤 이는 정부에서 하는 일 믿었다가 덕 본적 있느냐고 했고, 어떤 이는 주어봐야 쥐꼬리만큼이나 줄 테니 신경 쓰지 않는다고도 했다. 그러면서도 얼마쯤을 받게 되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오천원 냈으니 만원은 주겠지, 하는 사람도 있고, 삼만원은 준다더라는 사람도 있었다. 내가 들은 대로 받는 연금액은 최소 6∼7만원은 되고 더 내는데 따라서 그 액수도 많이 올라간다 라고 하자 모두들 믿지 않는 눈치였다. 겨우 오 년 동안 몇 천원씩 받고 죽을 때까지 그렇게 준다는게 말이 되느냐고 오히려 내게 따지기까지 하였다. 언제 정부에서 농민들에게 그런 선심 쓰는걸 봤느냐고 어림없는 소리라는 거였다.

신문께나 보는 사람은 정부에서 연금이랍시고 돈 끌어 모아다가 잘 못해서 다 까먹고 막상 돈 줄 때가 되면 줄 돈이 없을 테니 두고 보라고 했다. 그런 얘기들을 들으니, 의심이 생기기도 했지만, 아무려면 그렇게까지 정부에서 계획 없이 농어민 연금을 시작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물론 나중에 기금이 바닥나는 경우가 생기지 말란 법은 없겠지만, 특례노령연금에 해당되는 일은 아닌 거 같았다. 어쨌거나 완강하게 의심하는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기엔 나 자신도 확실하게 안다고 할 수 없었고 그러다보니 아들 친구가 간곡하게 한 얘기도 그만 흐지부지 넘어가게 되었다. 다만 공단에서 소득을 추정하여 보험료를 상향하여 책정한 액수는 군말 없이 납부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왜 공단에서 멋대로 올리느냐고 전화로 항의들을 했지만, 나는 이미 어느 정도 이것이 큰 혜택이 되리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올해, 마을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연금 수급자가 되었다. 모두가 후회하는 눈치였다. 보통 7만원 정도를 받는 듯했다. 일년에 팔십만원이 조금 넘는데 시골에선 그 정도의 액수라도 고정적인 수입으론 적은 것이 아니다. 많은 밑천을 들여 고추나 배추농사를 지어도 병이 오거나 값이 없으면 수익은커녕 적자를 면치 못하는 것이 농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게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공단에 전화를 해보니 이미 지난 2월에 내게 연금 수령의사를 묻는 편지를 보냈는데 내가 답신을 하지 않아서 자동으로 연금불입이 중지되었고 그래서 60개월 만기인 특례노령연금에서 5개월 분이 부족하다는 거였다.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우편물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나의 불찰이었다. 저녁에나 뜯어보자고 아무렇게나 둔 것을 종이만 보면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려대는 손녀딸 아이가 가져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통장을 확인해보니 과연 삼월 달부터는 보험료가 통장에서 빠져나가지 않고 있었다. 부랴부랴 다시 연장신청을 해서 보험료를 납입했다. 그리고 두어 주일 전, 마침내 월 91,710원을, 연 1,100,630원의 연금을 수령하게 되었다는 통지서를 받았다. 그리 많지는 않은 돈이지만 나는 아내와 함께 이 돈을 어떻게 할까, 상의를 했다.

그 동안에 우리 가족은 여섯에서 여덟명으로 늘어났다. 둘째 손녀와 손자가 태어난 것이다. 아들 둘을 다 키워서 성혼을 시켰을 때, 이제 내 할 일은 다 했구나, 싶었는데 손주들을 보니 그게 아니었다. 물론 그 애들이야 부모들이 또 보살필 터이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로서 대하는 손주의 모습은 어찌 보면 더욱 각별하다는 생각이 든다. 저놈들이 다 크도록 살았으면 하는 욕심도 생긴다. 그래서 아내와 난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받을 이 연금을 손주들에게 선물하기로 하였다. 고스란히 적금을 들어 십년 이십 년이 지나고 나면 그것도 꽤 큰 액수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기억과 더불어 손주들이 우리를 추억하는 좋은 선물이 되어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