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제4회 장려상)죽어서도 표현되는 그이의 사랑

작성부서

홍보실

등록일

2003/08/20

조회수

2141

내용

제4회 장려상
죽어서도 표현되는 그이의 사랑

김 영 순 / 경북 구미시 선산읍

1997년 6월 25일. 목사님과 몇 명의 교우들이 달려오셔서 예배를 드리는 동 안에는 전날부터 시작된 장마비가 그쳐 있었습니다. 모두들 남편의 마지막을 지켜보면서 찬송을 부르고 열심히 성경을 읽었습니다. 통증을 견디지 못해 괴 로워하던 남편도 예배시간에는 내내 조용했습니다. 그렇게 목사님의 설교가 계 속될 때 이불에 기대어 있던 그이가 무어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입 술만 조금 움직일 뿐 음성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맏이가 알아채고는 나에게 가 까이 오라고 불렀습니다. 다가가 앉으니 남편이 내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내가 손을 꼭 잡아주자 남편은 눈시울이 젖은 채로 나를 쳐다보며 다시 무어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함께 살아온 40년. 만 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순 다섯, 아직은 얼마든지 함께 살 수 있는 나이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너무 빨리 갔다고 했습니다. 이제 재미있게 살 때가 되었는데 하면서 아쉬워도 했습니다.

남편은 성격이 매우 급하고 날카로워서 사는 동안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모친을 잃고 결혼하자마자 부친을 잃었던 그이는 물려 재산 없이 사느 라고 고생이 많았고 평생을 가난과 함께 보낸 인생이었습니다. 일찍 도회지에 나갔더라면 삶이 달라졌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가진 것 없이 태어나 이 땅을 떠나는 날까지 고향을 벗어난 적이 없었던 가난한 생애였습니다.

그이에게 있어서 결혼은 너무나 귀하고 큰 역사였습니다. 가난하고 외로웠던 인생에서 결혼이 가져다 주었던 아내라는 선물을 남편은 너무도 소중하게 여 겼습니다. 그런 아내에 대한 남편의 사랑은 한없이 따뜻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감정 표현이 무딘 경상도 여자라 말 한 마디 따뜻하게 못했던 지난 날들이 죄 송함으로 남습니다. 비록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나를 기쁘게 해주려는 그이의 마음은 컸습니다.

첫아이를 낳고 나는 오래지 않아서 병을 얻었습니다. 결핵이었습니다. 가난한 집에서는 결핵은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보건소를 통해서 제공된 독한 약을 오 랫동안 복용해야 했습니다. 나를 살리려는 그이의 마음은 지극했고, 덕분에 나는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병약했던 내가 지금까지 건강하게 무슨 일이나 잘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이의 갸륵한 정성때문이었습니다. 내가 믿는 나의 하 나님이 그이의 정성을 보시고 고쳐 주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약 먹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그이는 내가 조금이 라도 아픈 기색을 보이면 약을 구해왔습니다. 결혼한 날부터 눈을 감는 그 순 간까지 한결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내 건강을 걱정했던 남편은 이제 제 곁에 없습니다.

이 땅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도 남편은 내 손을 꼭 잡고 흐린 눈빛으로 안 타까이 나를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런 남편의 눈에는 온통 사랑뿐이었습니다. 그 이의 눈에 고인 눈물은 살아오는 동안 다투고 속상했던 모든 것들을 씻겨내는 용서였습니다. 내 손을 잡은 그이의 손은 인간의 순수와 사랑의 띠였습니다. 길지 않은 순간이었지만 감격과 환희의 자리였습니다. 그이로서 내게 보인 최고도의 애정표현은 언제까지나 내 가슴에 새겨질 것입니다.

남편은 눈을 감는 그 순간에도 내가 심히 걱정되었나 봅니다. 혼자 남겨 놓고 먼저 가자니 맘이 놓이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결혼하고 이내 중병이 걸려 있던 약해빠진 나로만 기억이 되었는지 눈을 못 감겠다는 표정이었습니다. 곁에 있던 맏이가 눈치를 채고는 "아버지,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잘 모시겠습니다. ....예수님만 생각하세요" 라고 얘기했습니다. "걱정하지마! 잘 살테니... 하늘나라 가서 다시 만나..." 내가 미처 말문을 열기도 전에 내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남편은 아들의 말에 안심이 되었는지 평안한 얼굴로 눈을 감았습니다.

급작스런 남편의 죽음은 여러 가지 뒷일을 가져왔습니다. 당장 농사일로부터 마을일까지 변화가 많았습니다. 또 사망신고를 비롯해서 농협의 조합원 승계, 통장정리, 부채문제 등 복잡한 일을 처리해야 했습니다. 국민연금에도 신고했습 니다. 몇 가지 서류를 구비해서 신고하라기에 제출했더니 얼마 있다가 유족연 금을 받게 된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순간 남편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죽어서도 아내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는구나'

국민연금이 시작될 때 남편은 적극적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불신하는 태도를 보였고 가입을 꺼려하거나 형식적으로 가입하려 했지만 남편은 달랐습니다. 나는 보험이고 국민연금이고 간에 관심도 없었고 어떻게 되어 가는 줄도 몰랐 었는데 결과적으로 내게는 매우 소중한 것이 된 셈입니다.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도 새로 구입한 오토바이를 타고 이 집 저 집으로 감자를 나누어주던 남편이 갑자기 배 아프다고 병원에 갔을 때도 나는 남편이 남의 집 일을 하러 간 줄 알았습니다. 연락을 받고 저녁에 입원실을 찾았을 때도 시간만 지나면 괜찮을 줄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단 하루 입원하고 갑작스 럽게 내 곁을 떠나버렸습니다.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이 많이 해오시던 분이라 갑자기 떠나버린 남편의 빈자 리는 너무 컸습니다. 남편에 의지해 살았던 탓에 나는 모든 것이 여간 걱정스 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가신 분은 가신 분, 혼자서라도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다졌지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이가 하던 일은 전부 내 몫이 되었고 집안은 늘 허전했습니다. 요즘 세상에 당장 먹는 문제로 힘든 사 람은 그다지 없겠지만 현대생활에 돈이 얼마나 필요한지, 농촌에도 이것저것 쓸 곳이 많습니다.

2남 2녀로 자란 아이들, 두 딸은 출가했고 맏이는 사정상 나를 보태줄 형편이 못 되고, 막내는 경찰공무원으로 2년 째 근무하고 있지만 내 살림은 내가 꾸려가 야 할 입장입니다. 이런 내게 국민연금은 적잖은 위로와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석 달에 사십여 만원씩 지급 받고 있는데 생각할수록 마음이 듭니다. 아직은 건 강해서 이런 일, 저런 일 감당할 수 있지만, 날이 가고 나이가 더 들어 약해질 장 래를 생각하면 연금이란 것이 노후를 위해서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실감하게 됩 니다. 내게 이런 보장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물론 내가 받는 연 금이 살림에 절대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다지 넉넉지 못한 농촌생활에 상 당한 힘이 되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남편의 배려가 새삼 고맙습니다. 국가의 연금 제도를 충분히 이해하고 대처한 그이가 자랑스럽기도 합니다.

그이가 가신 지 일년하고 몇 달이 지났습니다. 생전에 그이가 하는 일이 마음 에 들지 않아 투정도 하고 싫은 소리도 하면서 기쁜 맘으로 협력하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립니다. 그러나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따뜻한 사랑을 확인시키고 가신 남편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남편은 죽어서도 자신의 사랑을 표현했고 남편 의 사랑을 확인시켜준 것은 국민연금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찾아 올 때마다 나는 의식적으로 남편의 이야기를 합니다. 혹시나 아 이들 머리에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남아 있을까 좋은 이야기 아름다운 기억들을 자랑스럽게 말하곤 합니다. 고향을 지키던 그이가 가시자 당장 벌초할 사람도 없고 집안 일을 챙길 사람도 없습니다. 마을일은 그이가 아니라도 대신할 사람이 있지만 남편처럼 좋은 일 궂은 일을 가리지 않고 챙기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아이들은 잘 몰랐을 것입니다.

자식들한테 아버지에 대한 좋은 기억을 심으려는 마음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지만 사실 나는 남편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더 큽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역사 를 움직인 인물은 아니었지만, 이웃에게 인정 많고 그러면서도 곧은 말을 잘 하 던 남편이었습니다. 자식들이 그이의 좋은 모습을 닮았으면 합니다. 너무 일찍 세 상을 떠난 아쉬운 생애였지만 따뜻한 가슴으로 열심히 살다간 남편이었기에 아이 들이 그이를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내게는 막내를 결혼시키는 일만 남아 있습니다. 우리 나이로 스물 여덟, 지금쯤 가정을 꾸렸으면 좋겠는데 아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자주 집에 들 리지만 잠자고 밥 먹고 가는 게 전부이다 싶습니다. 이런 점은 남편을 닮지 않았 습니다. 막내가 결혼해서 맞벌이라도 하게된다면 아이 키워주는 일을 하고 싶습 니다. 나이 때문인지 막내와 함께 하고픈 내 욕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나는 다섯 번째 연금을 수령하였습니다. 통장정리를 하면서 입금을 확 인할 때마다 감사함은 물론이거니와 송구스런 마음 또한 큽니다. 가입한 지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연금을 받고 보니 나라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 겹칩니다. IMF의 어려운 세상을 만나고 보니 더욱 그러합니다. 모든 돈이 그렇겠지만 결코 함부로 쓸 수가 없습니다. 나를 지극히 생각하고 사랑했던 남편의 정성이었기에 너무 소중합니다.

며칠 전에 그이를 보내고서 두 번째 추석을 맞았습니다. 아이들이 한자리에 모 일 때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자주 있는 자리도 아닌데 그냥 지나 치지 않도록 말입니다.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용기를 내서 해 보려고 합 니다.

'그래, 용기를 내도록 하자. 아이들 가슴에 뭔가를 깊이 새겨주어야지. 인생이란 다듬어 가기에 따라서 아름다운 것임을 아이들도 잘 알고 있을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