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제5회 우수상)새로운 동반자

작성부서

홍보실

등록일

2003/08/20

조회수

2269

내용

제5회 우수상
새로운 동반자

손재웅/부산 동래구 안락1동


어느새 다가온 겨울의 문턱에서 비가 내리고 있다. 빗물의 재촉을 받은 듯 노랗게 물든 은행잎은 서둘러 떨어지고 있다. 빗물에 젖은 은행잎이 자아내고 있는 처량함이 가슴속 한 구석에서 아련하게 피어난다.

대학을 졸업하고 패기가 넘치던 나이에 육군장교로 군인의 길로 들어선 이후 월남파병 등 많은 일들을 겪었고 전역 후 국영기업체 등에서의 직장생활을 큰 과오 없이 수행해 오다 1999년 3월 사회전반에 걸친 어려운 경제여건으로 나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직장생활을 그만두게 되었다.

실직으로 찾아온 허탈감과 무력감에 빠져 한동안 방황과 고뇌가 일상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직업을 잃는다는 것은 너무 충격적이다 못해 지금까지 겪어본 그 어떠한 일보다 나에게 큰 아픔을 가져다주었다. 실직의 아픔을 겪고 있는 다른 사람에게는 인간은 누구에게나 삶에 굴곡 있게 마련이고 슬기로운 행동으로 그러한 시련을 극복하여야 한다고 말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던 나는 막상 실직이라는 벽에 부딪친 순간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고 그저 멍하니 한숨만 내쉬어야 했다. 어떠한 희망도 갖지 못한 채 그저 무미건조한 생활이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고요한 명상과 기독교인으로서 신앙생활을 통하여 실직의 아픔과 고뇌를 극복하여 어느 정도 현재 내게 주어진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고 새로운 내일에 대한 희망이라는 꿈을 가지게 될 무렵 나에게는 또 한번의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꿈속에서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나에게 닥쳐왔다. 어느 날 화장실 변기에서 붉은 색깔을 발견하고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불길한 느낌이 뇌리를 스쳐갔다. 서둘러 찾아간 병원에서 많은 검사를 받게 되었고 의사로부터 검사결과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는 하늘이 노랗게 보이며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현상을 겪으며 한참동안 말문이 막혀 그냥 멍하니 않아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의사는 사진을 보여주며 사진 속에 나타난 검은 부분을 가리키며 이곳은 위인데 "위암말기"라니!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내가 위암에 그것도 말기에 해당된다니! 한참 후에 정신을 수습하자 의사는 큰 병원에 가서 정밀진찰을 받고 수술여부를 결정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 세상에서 나만큼 건강한 사람이 없다고 그토록 자신하던 나에게 위암말기라는 사형선고와도 같은 진단이 내려질 줄은 꿈에서도 조차 상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건강에 대한 이상이 아직 60세도되지 않은 나에게 이처럼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습니다.

딸이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는 서울 아산재단 중앙병원에 입원을 하고 진단결과 말기이기 때문에 수술해도 6개월 내지 1년 정도밖에 더 이상은 살수가 없다는 담당의사의 말이 있었습니다. 수술 후 5시간만에 의식을 회복하게 되었고, 그 때부터 끝을 알 수 없는 투병생활이 계속되었습니다. 수술후유증으로 장 유착이 제일 무서우니 될 수 있으면 걸어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수술 다음날부터 걷기 시작하여 오늘 첫째 보 내일 둘째 보 식으로 운동량을 조금씩 늘려갔고, 6차례에 걸친 항암치료를 받았습니다.

항암치료는 저에게 또 다른 고통을 가져 다 주었습니다. 항암제의 독성으로 탈모현상, 음식냄새의 고약함 등 육체적인 고통과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들조차 보기가 싫어지는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감내하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죽고 싶다는 생각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병간호로 지쳐 잠든 아내 몰래 주사기를 제거하고 싶은 심정을 수 차례 겪은 이후 아내의 헌신적인 간호와 눈물겹도록 간절한 기도와 정성으로 어느 정도 정신적으로 안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수술 이후부터 계속한 걷기 운동과 창조주에 대한 간절한 기도와 더불어 계속되는 치료를 통하여 건강을 많이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고통받았던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아득한 꿈처럼 여겨집니다.

젊은 시절 직업군인으로서의 삶은 나에게 부의 축적과도 거리가 먼 생활을 강요하였고, 그 결과 우리 가정의 경제사정은 그리 넉넉한 편이 되지 못하였다. 이 세상의 부모님들이 다 그러하듯이 나도 지난날에는 1남 2녀인 자녀들을 양육하는데 많은 비용을 지불하여야만 하였다. 또한 투병 생활은 가계 경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일상생활에서 따뜻한 한마디의 말이 큰 위로와 용기를 주기도 하지만 가계경제의 어려움에 기인한 불안감 내지 허탈감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줄 수는 없을 것이다. 건강의 호전과 정신적 안정을 되찾아 갈 때에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사실 경제적 어려움이 갑자기 닥쳐온 것은 아니다. 그림자처럼 항상 내 곁에 머물려 있었던 일상생활의 한 부분이 된지 이미 오래되었다. 단지 많은 고통 속에서 생활에 쫓겨오다 보니 그 심각성을 미처 깨닫지 못하였을 뿐이다.

이때 국민연금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국민연금관리공단에 전화로 상담한 결과 가입기간이 10년 이상이고 55세가 넘었기 때문에 소득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조기노령연금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구비서류 및 청구방법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본 후 서류를 준비하여 명륜동에 있는 국민연금관리공단 사무실을 방문하여 서류를 제출하였다.

상담직원은 방문목적에 대한 설명을 듣고 가져간 서류와 전산확인을 거쳐 조기노령연금을 받게 되며, 그 동안 받지 못한 4개월분 연금과 당월(7월)분 연금액을 합쳐 180여만원이 2000년 8월 31일에 신청한 통장으로 입금되며, 9월부터는 매월말일에 36만씩 입금된다고 하였다. 그 순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희열이 가슴속을 가득 채워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한여름의 이글거리는 태양이 오히려 따뜻하게 느껴짐은 왜일까?

지금까지 국민연금제도에 대하여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아니 올바르게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월급명세서에 있는 국민연금란의 금액이 너무 많다." "나중에 연금을 주기는 주는 것이냐?" 등 불평불만을 가졌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막상 연금을 받게 된다는 말에 반가움과 기쁨을 느끼는 내 자신이 조금은 쑥스러웠습니다.

수년 전에 몰아친 IMF한파는 많은 기업들의 문을 닫게 하였고, 헤아릴 수도 없는 많은 실직자를 양산시켰으며, 단란한 가족을 뿔뿔이 흩어지게 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을 길거리에서 방황하게 하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주었습니다. 또한 아직도 그 여파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민연금제도가 조금 더 일찍 시행되었더라면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감소시킬 수 있었을 것이고, 나도 또한 더 많은 금액을 연금으로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연금을 몇 번 수령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월말을 기다리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병들고 어려울 때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힘이 되어 주고 있는 연금이 고마울 따름입니다. 연금은 남은 여생동안 건강유지와 생활안정에 믿음직한 새로운 동반자가 될 것입니다. 몇 일이 지나면 다가올 월말이 기다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