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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최우수상)이 무슨 홍복(洪福)인가

작성부서

홍보실

등록일

2007/04/12

조회수

2271

내용

2회 최우수상
이 무슨 홍복(洪福)인가

박 용 현 / 서울시 강서구 화곡6동

오늘은 나에게 적지않는 기쁨이 안겨지는 날이다. 월급을 받을만한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요, 그 렇다고 누구에게 생활비를 받을만한 처지도 아니지만 오늘만은 지갑 속이 두둑해질 터이다. 이름 하여 국민연금 수령일이다.

아침나절에는 집안청소를 하였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을까. 며칠째 몸살로 누워있는 중이었지 만 용수철마냥 퉁겨져나와 말끔히 걸레질을 하였다.

돈이 무엇인지, 선인들은 황금을 돌같이 여기라고 하였지만 나는 어쩔 수 없는 소인배인가 보다. 물론, 생존과 직결된 돈이긴 하지만, 돌같이 보기는 커녕 설날 아침의 아이처럼 신명이 나 있으니 말이다.

지명(指命)의 등성이를 넘어서고 보니 달력 한장을 떼어낼 적마다 가슴 속으로 찬바람이 지나간 다. 생의 여정에서 또 한순간이 사위어간 아쉬움이다. 편도표 한장을 달랑 쥐고 시간이란 기차에 편승하여 떠나온 시발역은 아스라해져 간다. 이제 점점 감이 잡혀오는 건 해가 뉘엇거리는 종착역 의 풍경이다.

젊은 시절. 고비에 부딪쳐 허덕일때면 곧잘 이런말을 하곤했다. “어서 이놈의 세월이나 지나가버 렸으면.”조르지 않아도 쏜살처럼 가버리는 것이 광음인 것을. 이 미련한 소견머리는 미처 몰랐었다. “오는 백발 가시로 막고 막대로 치려고 했더니, 백 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는 옛 시인의 탄식을 음미해 보는 요즈음이다.

그런데, 이 일을 어쩌랴. 이율배반적인 나의 양태를 어떻게 설명을 해야할지. 세월가는 것이 덧없 다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달력을 뜯어내며 어떤 기대에 부푼다. 3월이 지나가면 6월을, 또 6 월을 보내면서 9월과 12월을 생각한다. 내 생활월력에서 그 석달이 갖는 의미는 결코 가볍지가 않 다. 우뚝 솟은 봉우리라 할지. 내 생전에는 마르지 아니할 생계의 원천(源泉)이 거기서 흘러 나오 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을 받기 시작한지 이태째다. 수혜자로서 그만한 햇수가 흐른 셈인데, 그 기간은 또 남편 이 세상을 뜨고 보낸 세월의 길이와 같기도 하다.

92년 4월. 진달래가 만개한 산중턱에 남편의 흙집을 마련하였다. 삼베옷 한벌 달랑 입혀 그곳에 들여보내고 나는 멍청이처럼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한 일이 그의 용품들을 정리하 는 일이었다. 모두 다 보고싶지가 않았다. 자구책이라고나 할까. 그로부터 헤어나오려는 몸부림이 었는지도 모른다.

손때가 묻은 물건이라던가 체취가 배어있는 옷가지를 꺼냈었다. 생자필멸이라고는 하지만 내가 왜 갑자기 이런 일 을 당해야 하는지. 남의 일로만 여겼던 미망인의 의미를 그제서야 알듯 했다. 사전에 들추어 보니 ‘아직 죽지못한 사람’이라고 씌어 있다. 조금만 비약을 하면 죽어 마땅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사지는 그런대로 꼼지락 거리고 있지만 그 내면은 거반 넋나간 상태였다.

마대 속에 옷을 집어 넣다가 베이지색 상의에 눈이 멎었다. 콤비네이션 차림이 어울리던 그가 늘 입고 다니던 것이다. 부산 출장길에 사입고 와서 몹시 기뻐하였다. 웃는 얼굴이 망막을 덮어왔다. “다섯살박이 손자가 장가 들때까지 살겠다”고 하더니…… 멍울같은 것이 목울대를 타고 올라와 흡사 짐승의 울음처럼 터져 나왔다. 참고 있던 오열이다.

양복 주머니에 두 손을 넣었다. 유난히도 소지품을 잘 챙기던 사람이다. 말하자면 주머니 애용자 다. 다시는 해후할 수 없는 우리, 그의 손이 수없이 들랑이던 곳에 별리를 고하듯 내 손을 집어 넣었다. 그런데 거기서 무엇인가 잡혀왔다. 넥타이 핀이 나오고 또 다른 하나는 명함 크기의 증명 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것은 국민연금증서였다.

남편 사후, 흐느적거리던 나로서는 그 뒷 일 처리도 헐북한 것이 아니었다. 진단서를 첨부한 사망 신고, 가옥상속에 따른 제반서류 등 되도록 빨리 그 사람과 관련된 일을 마무리하고자 했다. 뭐랄 까. 악몽으로부터의 탈출이랄지 그 음영에서 벗어나는 길을 알고 싶었다. 그때 내 몰골은 망망대 해에 떠 있는 일엽편주와도 같았다.

이제 혼자다. 튼튼한 울타리였으며, 유일한 동행을 놓쳐버렸다. 호적까지 정리를 하고나니 기진한 채 상실의 늪 속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이즈음 회사에서 온 전화를 받았다. 송금 연락이었다. 퇴 직금인데 그것도 감사해야했지만 실로 미미한 액수였다. 직장을 두어차례 옮긴 탓에, 한 일터에서 일관한 이들처럼 두둑하지를 못했다. 달리 대책이 있는 상황도 아니어서 살아갈 일이 막막하였다.

동생은 누이의 여생이 염려스러웠는지 넌지시 귀띔을 하였다. 일시불로 받지 말고 연금으로 받으 라고. 그는 교육계에 몸담고 있는 지라 그들처럼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한 줄 아는 모양이었다. 나 도 그런 바램이 왜 없겠는가. 제발 한꺼번에 받지 않겠으니 거기에 상응하는 배분액을 매월 받을 수만 있다면 단연 그쪽을 택하고 싶다.

돈이 있으면 쓰게 마련이다. 게다가 자립하지 못한 아이들이 딸려 있으니 문제가 더 심각해질 수 있 다. 곶감 꼬치에서 곶감 빼 먹듯 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퇴직금을 찾기 전날이다. 재직시 남편의 급여를 보내주던 경리과로 전화를 하였다. 그동안 고마웠 다는 인사도 할겸 다소 궁금했던 사항들을 알고 싶었던 까닭이다.

“국민연금도 퇴직금에 합산이 되어 있는지요.” “아닙니다. 국민연금관리공단에 별도로 신청을 하십시요. 아마 일시불로 얼마쯤 받으실 겁니다.” 얼추 셈을 해 보았다. 사용자측에서 낸 금액이 얼마인지 정확히는 모른다. 우리가 다달이 3만원씩 내었으니 회사에서도 아마 그 정도였으리라는 짐작이다. 양쪽을 다합쳐 보았으나 뻔한 액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시작하지 4년만에 남편의 나이는 60이 되어 있었다. 연금을 대비하여 돈을 낼 수 있는 기간은 예순살로 종료가 된다. 얼마간을 또 받게 되는구나 싶으면서도 웬지 모르게 착찹해지 는 마음이었다. 오래지 않아 흔적도 없어져 버릴 것 같은 일말의 불안감이 찾아든 것이다. 내 얼 굴은 흡사 바람빠진 타이어 꼴이 되어 갔다.

몇해전인가 한다. 큰 아이가 미국에 살고 있어 그곳에 들렀었다. 그때 우연히 만난 교포 노인의 말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어느 효자인들 이리하겠소. 날짜 한번 어기지 않고 와요.” 행복한 듯 들려준 그분의 효자 운운은 제 날짜에 착착 도착하는 연금을 두고 한 얘기다. 궁상을 떨지 않아도 될 생활비를 받는 나라에서 사는 것이 무척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말로만 듣던 복 지사회의 국민을 목도한 셈이다.

복지란 무엇인가. 직역을 하자면 복과 이익이란 뜻이 되겠다. 노경에 들어서도 생활이 안정을 누 릴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가장 핵심적인 복을 향유했다고 본다.

맨처음 연금제도가 확립된 나라는 독일이라고 한다. 1881년 바스마르크가 고용주와 피고용인에게 서 돈을 갹출하는 사회보장제도를 제의하였다. ‘노후연금을 받게 되는 자는 한결 만족해 하고, 그런 전망이 없는 자보다 다루기가 훨씬 쉬워진다’는 발상에서 태동을 했다니 반드시 독일 근로 자를 사랑해서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제도의 결과는 어떤가. 국민들의 얼굴에서 그 늘을 몰아냈다. 그리고 안도의 꽃을 피웠다. 장래가 보장되면 우선 사람의 성품이 너그러워진다. 각박함에서 벗어나 화평한 사회가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18세 이상 60세 미만을 대상으로 국민연금이 시작된 해는 88년 1월이다. 남편이 56세가 되던 해다. 특례조항이 있어 5년 이상 가입하고 60세가 되면 연금을 받을 수 있다고 하지만, 남편 은 56세에 가입하여 60세까지 4년밖에 안돼 1년이 부족해서 혜택권 밖으로 밀려 나지 않을까 애 석해 했다. 그러나 남편같은 사람을 위해 임의계속가입제도가 있어 65세까지도 연장하여 가입할 수 있다고도 한다. 그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하지만 그 5년을 채워 연금을 받기도 전에 돌아 가셨으니 국민연금에 대한 하등의 기대가 있을수 없었다. 다만 저축금으로 비슷하게 약간의 돈을 찾는 것 쯤으로 알고 있었다.

우리가 속한 연금공단은 영등포지부다. 전화로 위치 확인을 하고 찾아나섰다. 나의 상담역은 젊은 직원이었는데 신세타령까지 낀 이쪽의 횡설수설을 참을성있게 들어 주었다. 누군가의 얘기를 조용 히 들어준다는 것 하나의 덕행이 아닐지. 민원인을 불청객 쳐다보듯 할때 그사람의 인품에 대해서 일말의 비애를 느껴오던 터다.

“분기당 591,120원을 유족연금으로 받게 됩니다.”“뭐라고요? 다시 한번 계산해 주세요. 확실한 지.”틀림없다는 담당자 말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 아들 또래의 청년에게 고개까지 주억거렸다. 사실을 말하자면 화들짝 놀라며 감격했다. 꿈인가. 생 시인가. 이런 홍복이 내 몫도 될수 있나 해서 어리둥절하였다. 때는 5월, 사무실 문을 나와서 바라 본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내 얼굴도 오랫만에 그 하늘을 닮아가고 있었다. 짐작했던 일시금이 아 니고 종신토록 연금이라니. 내 생애에 큰 획으로 남을 행운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속물이다. 별리의 통고 한 편에는 호구에 대한 불안에 상당량 배어 있었던가 보 다. 장성한 아이들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들도 아직 제 나름의 인생을 살아가느라고 바쁘다. 옛 날같으면 자식이 곧 노후대책이었지만 오늘날은 어디 그런가. 얼마전 일이다. 부모를 잠시 모신 딸이 그 부양비를 받겠다고 소송을 한 사건이 있었다. 시대적 변혁기라 할지. 자녀를 향한 애착은 점점 심화되어 가면서 부모에 대한 부양은 날로 약화되어 간다.

‘우리도 부양받을 권리가 있다’어느 노인단체에서 내 건 표어이다. 그러나 실세(경제력)없는 이 들의 외침은 한낮 메아리에 불과하다. 나는 아들과 함께 지낸다. 그리고 딸도 가까이 산다. 그들의 월급날을 어렴풋이 알고 있는터다. 이런 날, 어미에 대한 약간의 배려도 없이 그냥 지나가버면 웬지 모르게 눈물이 나려고 한다.

저희들 살기도 빠듯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렇다. 하지만 제법 태연하게 참아낸다. 그건 관용의 미덕을 지녀서도 아니요, 특별히 이해심이 많아서도 아니다. 이유는 간명하다. 나에게도 연금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번 달에는 인상분을 더 받았다. 쌀 반가마 값에 해당이 된다. 물가변동폭에 따라 11.3%를 더 지 급한다는 통지서를 받고 노적가리를 바라보는 농부처럼 흐뭇하였다. 돈을 찾으면 우선 봉투 셋을 만든다. 20만원씩을 나누어 담고도 이번에는 얼마간의 여유가 생긴다. 아이들에게 수박 한덩이씩 이라도 안길 생각이다. 아들네와 동거한다는 얘기를 아까도 잠깐 했지만, 생활비는 각각 부담하는 형식이다. 나도 봉투하나를 내면 한달치의 밥값에 충당이 된다.

노령인구가 늘어가는 추세다. 더욱이 여자 노인의 고령화는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어 간다. 내 인 생의 여정이 언제까지 계속이 될지, 이건 모르겠다. 질병같은 돌발적인 문제만 아니라면 적어도 식비걱정은 아니해도 될 것 같다. 국민연금이 조금만 늦게 실시되었더라면 나는 어찌 되었을까. 지금처럼 이렇게 밝은 얼굴로 살아가지는 못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