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봉화 이 가을, 마음은 마냥 물들다
글 · 사진 안수현_여행작가
어느새 가을이다. 은행잎은 황금빛으로 물들었고 플라타너스 잎은 살짝 부는 가을 바람에도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가을 여행 계획하는 분들께 경북 봉화를 권해드린다. 닭실마을을 걷고 청량산에도 올라보시길. 이처럼 예쁘고 느긋한 가을이 있었나 싶을 테니 말이다.
봉화 가을여행의 첫 코스는 닭실마을. 봉화읍에서 2km 남짓 떨어진 이 마을은 풍산 류씨가 사는 안동 하회마을, 의성 김씨가 사는 안동 내앞마을,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가 함께 사는 경주 양동마을과 함께 영남 4대 길지로 손꼽히는 곳이다.
영남 제일의 정자, 청암정
닭실마을은 충재 권벌의 종택이 있는 마을. 충재 권벌은 중종 때의 문신으로 조선 중종 2년 문과에 급제한 후 예문관검열, 홍문관수찬, 부교치, 사간원 정언 등을 역임했고 예조참판까지 올랐던 사람이다. 옳다고 생각한 것을 말함에 거침이 없었던 그는 관직에 있는 동안 두 번의 사화를 겪었고 두 번 모두 파직을 당했다. 충재는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삼척부사에서 파면되자 닭실마을로 와 500년 종가의 터를 잡았다.
충재는 거처할 집을 짓고 난 후 그 곁에 독서를 위해 한서당과 거북이 모양의 바위 위에 청암정이라는 누정을 지었다. 청암정은 형식미와 구조미가 가장 빼어난 정자로 손꼽힌다.
청암정 앞 주차장에서는 흙담장과 나무 때문에 정자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별세계가 펼쳐진다. 아담한 연못이 있고 그 연못에는 붉은 단풍나무 한 그루가 눈부시게 드리워져 있다. 버드나무와 향나무도 어우러져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수백 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고목 한 그루는 세월을 증언하는 듯 허리를 비틀고 연못에 두꺼운 몸통을 걸치고 있다. 연못 너머 커다란 바위 위에는 방금 날개를 쳐든 모양의 팔작지붕 정자인 청암정이 올라가 있는데, 그 모습이 보통이 아니다. 청암정은 바위를 생긴 그대로 이용하여 기둥을 세워 지었는데, 바위를 평평하게 다듬지 않고 기둥 길이를 조정해서 지었기 때문에 보는 위치에 따라 건물 높이가 다르게 보인다고 한다.
청암정 앞의 충재박물관(기념관)은 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곳. 안동 권씨 충정공파 집안의 유물 등 다양한 문화재 467점을 전시하고 있다. 이중에서 충재일기, 근사록, 우향계축, 심경, 사마방목, 문과잡과방목 등 15종 184책으로 이루어진 권벌 종가 전적은 1986년 11월 29일 보물 896호로 일괄 지정되었다.
유유자적 가을산책, 달실마을
청암정에서 나와 달실마을로 향한다. 들판 쪽에서 마을을 바라보면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의 형국이라고 해서 일찍이 ‘닭실’이란 이름을 얻었다. 사실 닭실마을을 주민들은 ‘달실’이라 더 부른다. 최근에 만들어지고 있는 홍보 자료에는 ‘달실’마을이라고 적혀 있다.
마을은 느긋한 걸음으로 돌아보기 좋다. 멀리 보이는 모양새까지 제대로 갖춘 기와집들은 고향집에라도 온 양 푸근하기만 하다. 높지도 낮지도 않게 구불거리며 흘러가는 흙돌담길, 담 밖으로 기웃이 고개를 내민 감나무 가지 등 모든 풍경이 어여쁘고 넉넉하다.
달실마을에서 유명한 것은 한과다. 충재 종택이 터를 잡고 제사를 모시면서부터 한과를 만들기 시작해 500여 년 동안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자연의 선물인 자화초와 치자로 물들인 형형색색의 오색강정은 정말로 예쁘고 먹음직스럽다.
기품 있는 가을과 만나다, 만산고택
봉화에는 가을 운치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한옥도 있다. 춘양면 의양리에 자리한 만산고택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인 만산(晩山) 강용(姜鎔, 1846~1934) 선생이 고종 15년(1878)에 지었다.
문수산과 낙동강의 첫 번째 지류인 운곡천을 배산임수 삼아 들어선 만산고택은 전형적인 사대부 집안의 가옥구조를 보여준다. 방문객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건 11칸의 긴 행랑채 중앙에 우뚝 솟은 솟을대문이다. 솟을대문은 정3품 당상관 이상의 벼슬을 해야 가질 수 있다. 다시 말해 임금님이 계시는 근정전에 올라가서 정사를 논할 수 있는 반열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펼쳐진다. 마당 건너편에 ‘ㅁ’자형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이어져 있고 왼편엔 공부방인 2칸짜리 소박한 서실이 있다. 오른편으로는 따로 담을 두르고 문을 낸 별당 ‘칠류헌(七柳軒)’이 고풍스럽게 서 있다.
얼핏 보기에도 정갈한 사랑채 처마 밑엔 각각 ‘만산(晩山)’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만산’은 대원군이 직접 쓴 글씨인데 지금은 서울의 한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현재 걸려 있는 건 탁본이다. 만산은 대원군과 친분이 돈독했다고 한다.
사랑채 옆에 자리한 서실은 후손들의 공부방 용도로 지은 것이다. 네 곳의 추녀마루가 동마루에 몰려 마치 네 면 모두가 지붕면을 이루는 ‘우진각 지붕’이 특이하다. 지붕 밑에는 어김없이 ‘한묵청연(翰墨淸緣)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고아한 학문을 닦는 곳’이라는 뜻인데, 영친왕이 8세 때 쓴 글씨라고 하니 놀랍다.
청량산에서 만나는 가을
봉화 여행의 마지막 코스는 청량산이다. 봉화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산이다. 바위 봉우리와 기암절벽이 어우러져 절경을 빚어낸다. 퇴계 이황 선생이 중국의 무이산에 비유하여 ‘조선의 무이산’이라 칭하며 주자학의 성지로 칭송하던 명산이다.
청량산의 가을은 육육봉 아래 자리한 청량사까지만 가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청량사에서는 중심 전각인 유리보전을 유심히 볼 것. 안에는 약사여래상이 모셔져 있다. 아픈 사람을 치유한다는 부처다. 국내에 하나뿐인 종이를 녹여 만든 지불(紙佛)이다. 금박을 입혀 겉모습만으로는 종이부처인지 눈치 채지 못한다. 유리보전 현판은 고려 공민왕의 친필이다.
절 오른쪽으로 난 오솔길을 걸어가면 ‘어풍대’에 닿는데, 이곳에서 청량산의 육육봉(12 봉우리)을 한 눈에 조감할 수 있다. 어풍대에 서면 ‘산은 연꽃이고, 절터는 꽃술’이라는 사실을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어풍대에서 청량산을 바라본다. 어느새 울긋불긋한 단풍이 들고 있다. 봉화에서 제대로 된 가을을 만난 듯하다.
영동고속도로와 중앙고속도로를 이용해 풍기IC로 나와 봉화·울진 방면 36번 국도를 따라 내처 달리면 된다. 법전역을 지나 88번 지방도로 갈아타면 춘양역과 만산고택이 나온다. 봉화는 송이버섯 돌솥한정식으로 유명하다. 가을산에서 채취한 송이를 급속 냉동해 송이 향이 살아있다. 송이버섯을 먼저 먹은 후 돌솥밥은 산나물에 비벼 먹는다. 매호유원지와 봉화읍 중간쯤에 위치한 봉성은 돼지숯불구이로 유명한 마을이다. 소나무숯불에 굵은 소금으로 간을 해 구워내는 돼지고기는 기름이 빠져 쫄깃쫄깃하고 담백한 맛을 자랑한다. 솔잎 위에 고기를 얹었을 뿐인데 솔향이 제법 진하게 밴다. 넛재 기슭에 청옥산 휴양림(054-672-1051)이 있다. 9평 규모와 10평 규모의 통나무집이 모두 6동 있다. 만산고택(054-672-3206)에서 한옥체험을 할 수 있다. 예약은 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