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변산
여행 눈 쌓인
전나무 숲길을 걸으며
만나는 고요의 겨울
글 · 사진 최갑수_여행작가
겨울 변산, 마음을 지그시 눌러주는 고즈넉한 절과 사색하며 걷기 좋은 숲길이 있는 곳.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채석강과 젓갈이 유명한 곰소항은 변산 겨울 여행을 더욱 즐겁게 해준다.
내소사 전나무숲길을 걸으며
서울 센트럴터미널에서 부안행 버스를 탔다. 창 밖으로 겨울의 스산한 풍경이 스친다. 서울을 벗어나자 눈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세 시간 남짓 달렸을까. 차는 부안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터미널에서 줄포를 경유해 내소사 방면으로 가는 군내버스를 탈 수 있다. 내소사까지 약 50분 정도가 걸린다.
내소사 가는 길, 싸락눈은 어느새 함박눈으로 바뀌었다. 차창으로 스치는 눈송이가 탐스럽다. 솜뭉치가 떨어지는 것 같다. 내소사는 633년(백제 무왕 34년) ‘혜구두타’라는 여승이 창건했다고 한다. 관음봉(433m) 아래에 있는데, 관음봉을 일명 능가산이라고 부르는 까닭에 보통은 '능가산 내소사'로 불리기도 한다. 본래 이름은 소래사(蘇來寺). ‘다시 태어나기 위해 찾아오는 곳’이라는 뜻이다.
내소사 일주문 앞. 눈이 복숭아뼈 높이까지 쌓였다. 전나무 숲길 바닥은 온통 눈으로 하얗다. 내소사에 가려면 전나무 숲길을 꼭 거쳐야 한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내소사를 복구하면서 절에 이르는 길이 너무 휑해 전나무를 심으면서 울창해졌는데, 지금은 사찰보다 더 유명해졌다.
내소사 전나무 숲은 월정사, 광릉 수목원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전나무 숲으로 꼽힌다. 월정사 숲길이 가지런히 정리된 모습이라면 이곳 숲길은 나무들이 자연스럽게 심어져 있어 더 푸근한 느낌이 난다. 하늘을 찌를 듯 솟은 30~40m 높이의 아름드리 전나무들이 사찰 앞까지 600여 미터 이어진다. 숨을 크게 들이쉬니 전나무 특유의 맑은 향내음이 몸 깊숙한 곳까지 스민다. 바람이 부니 향이 더 진하게 코끝을 파고든다. 머릿속이 환해지는 느낌이다.
고졸한 멋 가득한 내소사
내소사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고졸한 멋을 풍긴다. 고려동종, 법화경절본사본, 대웅보전, 영산화쾌불탱화 등의 보물을 보유하고 있으니 부화(浮華)한 사찰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대웅보전은 못 하나 쓰지 않고 나무를 깎아 끼워 맞춰 지었다고 한다. 특히 정면 여덟 짝의 꽃무늬 문살은 꽃잎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담은 정교한 조각으로 유명하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씻겨 색은 모두 지워져 채색 없이 말간 나뭇결을 그대로 내보이고 있지만 오히려 그 소박함이 보는 이로 하여금 경건함을 자아내게 한다. 대웅보전 법당 안 부처님을 모신 불단 뒤쪽에는 벽 전체 가득 백의(白衣)관음보살좌상이 그려져 있다. 국내에 남아 있는 백의관음보살좌상 중 가장 크다. 이 관음보살의 눈을 보고 걸으면 눈이 따라오고, 그 눈을 마주치면서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템플스테이를 경험해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내소사는 트레킹 템플스테이로 유명하다. 사찰에 머물면서 산과 계곡을 걸으며 사색에 잠기는 프로그램이다. 내소사를 출발해 직소폭포, 제백이고개, 관음봉 삼거리, 전나무 숲을 거쳐 다시 사찰로 돌아오는 코스다.
트레킹 템플스테이가 부담스럽다면 휴식형 템플스테이에 참여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새벽 예불과 공양만 참여하고 자유롭게 템플스테이를 경험할 수 있다. 절에 하루만 머물러 보시길. 그러다보면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 나뭇잎이 구르는 소리, 물 흐르는 소리까지 또렷이 들린다.
마음을 빼앗는 아름다움, 눈 내리는 채석강
‘임술 초가을 열엿샛날에 나는 손님과 배를 띄우고 적벽의 아래에서 노닐었다. 맑은 바람은 천천히 불어오고, 물결도 일지 않는데 술잔을 들어서 손님에게 권하며 명월의 시를 읊조리며 요조의 장을 노래했다.’
중국 송나라 때의 시인 소동파는 중국 황주의 아름다운 적벽강 풍경에 반해 이 같은 시를 남겼다. 당나라의 시인 이태백은 채석강에서 뱃놀이를 하던 중 강물에 비친 달을 잡으러 물에 뛰어들었다가 삶을 마감했다. 적벽강과 채석강, 두 곳 모두 당대 최고의 시인의 마음을 홀딱 빼앗을 만큼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곳. 부안의 적벽강과 채석강은 중국의 적벽강과 채석강의 아름다운 경치를 쏙 빼닮았다고 해서 똑같은 이름이 붙었다.
적벽강은 해안절벽 지대다. 각양각색의 바위들이 해안가에 서 있다. 아름다운 여인의 형상을 한 것도 있고 토끼와 사자 등 동물을 닮은 것도 있다. 해질녘이 아름다운데, 주황빛 노을을 받는 암석들이 더욱 신비로운 모습을 만들어낸다. 벽강에서 약간 떨어진 채석강은 변산반도 서쪽 끝에 1.5km 가량 이어진 해안 절벽을 말한다. 적벽강과 마찬가지로 강이 아니라 변산반도 서쪽 끝 격포항과 그 오른쪽 닭이봉 일대 1.5km의 층암절벽과 바다를 총칭하는 이름이다. 화강암, 편마암을 기저층으로 약 7천만년 전인 중생대 백악기에 퇴적한 단애가 마치 수 만 권의 책을 쌓아놓은 듯이 와층을 이루고 있다. 기기묘묘한 해식 단애의 모습은 자연의 신비한 섭리를 한껏 일깨워준다.
곰소항 젓갈정식 앞에서
변산반도를 여행하는 방법은 30번 국도를 따라 가는 것이다. 외변산을 아우르는 이 길은 부안에서 새만금, 대항리를 거쳐 채석강, 격포, 모항, 곰소로 이어진다. 30번 해안도로는 변산반도를 일주하는데, 서해안에서도 아름답기가 으뜸이다. 오른쪽으로 해변을 끼고 굽이치는 이 길은 눈길 주는 곳마다 고즈넉한 포구와 기암절벽, 아늑한 해변이 마술을 부리듯 나타났다 사라진다.
모항 마을은 60여 가구 100여 명이 살아가는 작은 마을이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날 정도의 길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낮은 집들이 정담을 나누듯 마주하고 있다. 낙조가 아름답기로 소문난 마을이지만, 아쉽게도 눈이 내린다.
모항을 빠져 나와 계속 30번 국도를 따르면 진서면에 자리한 곰소항에 닿는다. 변산반도와 선운산 사이로 깊숙이 파고 든 곰소만(줄포만)을 끼고 있는 곳이다. 원래 웅연도(熊淵島)라는 섬이었는데, 곰소 앞바다의 대죽도와 소죽도, 칠산바다 어선들의 불빛이 어울려 ‘웅연조대(熊淵釣臺)’라는 절경을 빚어냈던 곳으로 유명하다.
사람들은 곰소하면 젓갈을 떠올린다. 변산반도 근해에서 어획되는 어류에 곰소 염전에서 생산된 소금을 뿌려 만든다. 곰소항 제방을 따라 젓갈가게가 늘어서 있는데, 가게마다 시식대를 마련해두고 있어 맛을 보고 사갈 수도 있다. 잡것을 섞지 않고 자연 발효와 오랜 숙성을 거쳐 탄생하는 젓갈은 다른 지역의 젓갈에 비해 감칠맛이 빼어나다.
격포항 앞에 대명리조트 변산이 있다. 채석강, 적벽강과 가깝고 해변과 바로 연결돼 있다. 바데풀과 노천탕, 해수사우나 등을 갖춘 아쿠아월드를 비롯한 부대시설도 잘 돼 있다. 변산온천산장(063-584-4874)은 부안 바지락죽의 원조로 꼽히는 곳. 계화회관(063-584-0075)은 30년 째 백합죽을 차려온 집이다. 찜과 탕, 구이 등 다양한 백합요리도 먹을 수 있다. 군산식당(063-583-3234)은 백합탕으로 유명하다. 어린아이 주먹만 한 백합이 가득 들어있다. ‘백합정식’을 주문하면 백합구이와 백합탕, 백합죽 등을 한꺼번에 맛볼 수 있다. 곰소항의 곰소쉼터(063-584-8007)는 오래전부터 젓갈정식으로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집이다. 바지락젓, 오징어젓, 토하젓, 밴댕이젓, 낙지젓, 토하젓, 갈치속젓 등이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