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순효]

비석말고 소주 한병만 묻어 다오

물재(勿齋) 손순효[孫舜孝, 1427~1497]는 조선 성종대의 문신으로 1457년(세조3년)에 문과에 급제, 형조참의, 경상도관찰사, 도승지, 형조판서, 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좌참찬에 이르렀다.

성리학에 밝고 문장이 뛰어났으며 특히 청렴하기로 이름이 높아 성종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

김홍도 [주막] - 출처 : 네이버 이미지

청백리로서 임금의 총애를 받아 요직을 두루 거친 신분이지만 손순효는 애주가로 유명했다.

그것도 적당히 풍류삼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지나치리만큼 술을 좋아해 곧잘 그의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하루는 성종이 불러 중국에 보내는 국서(國書)를 지으라는 명을 내렸으나 그는 이미 만취상태에 있었다.

성종이 대노하여 다른 신하를 부르라 명하자 손순효가 엎드려 집안에 좋은 일이 있어 어쩔 수 없이 마셨다고 하며 극구 자신에게 맡겨달라 간청하였다.

과연 어떻게 하나 보려고 붓과 벼루를 내주니 그는 거침없이 일필휘지(一筆揮之)로 문장을 풀어놓았는데 단 한 자도 틀리지 않았다.

성종이 보기에 괘씸하긴 했지만 그 취기에도 놀랄 만한 정신력을 지녔음을 보고 칭찬하며 “너는 취한 정신이 더 맑구나”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술을 너무 많이 마시면 해로우니 “하루에 이 잔으로 한 잔 이상은 마시지 말라”면서 은잔 한 개를 하사했다.

손순효가 보기에 너무 조그만 잔이라 아무리 독한 술을 부어 마셔도 취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은장이를 시켜 얇게 두드려 펴서 사발만한 잔을 만들어 독주를 한잔씩만 마셨다.

어느날 다시 성종이 불러 입궐하였는데 이날도 그는 술에 취해 있었다.

자신의 명을 어긴 것이라고 생각한 성종이 크게 화를 내며 잔을 가져와보라고 호통을 쳤다.

임금 앞에 대령한 술잔은 사발만 한 것이어서 “이건 내가 준 술잔이 아니지 않느냐”고 물었다.

손순효는 부복하며 “주상께서 주신 술잔이 너무 작기에 은장이를 시켜 늘리기만 했을 뿐 은의 양은 조금도 더하지 않았사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성종은 크게 웃으며 “앞으로 내 속이 좁은 데가 있으면 그렇게 두드려 넓게 펴다오”라며 다시는 술과 관련한 일로 손순효를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늘 안주가 부족한 손순효의 집에 가끔 음식을 보내기도 했다.

당사자들의 이름만 뺀다면 요즘도 잘 알려진 옛 이야기인데 새삼 수기치인(修己治人) 원칙에 충실한 옛 선비의 모습과 호방한 임금의 풍모가 떠오르게 한다. 요즘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으로서도 부러움을 느낄만한 돈독한 상하관계다.

두 사람은 이처럼 단순히 군신의 관계, 상하급자의 권력서열을 떠나 인간적인 애정과 신뢰로 맺어진 관계였으니 이를 짐작하게 하는 또 다른 일화가 있다.

손순효가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해있던 시절, 매일 대하던 성종이 보고 싶어 야밤에 몰래 한양에 올라와 임금을 만나고 간 일이 있었다. 이 사실을 안 다른 신하들이 들고 일어나 ‘관찰사가 자리를 함부로 비우고 마음대로 도성에 올 수 있느냐’며 상소하였다.

성종도 감사가 임지를 함부로 떠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아들이 어버이를 그리워하는 것이 군신 간의 정리다. 날마다 만나던 나를 보고 싶어 밤을 낮 삼아 왔다 간 그가 무슨 죄가 있느냐. 너희도 멀리 떠나 있으면 어버이도 임금도 보고 싶지 않겠는가.”라고 답하였다. 간관들도 정이 넘치는 성종의 말에는 그만 할말을 잃고 말았다.

손순효는 세상을 떠나며 유언에서 “내가 죽으면 비석을 세울 생각은 말고 평생 좋아하던 소주 한 병만 곁에 묻어 달라”고 말했다.

마지막까지도 술을 좋아했던 것인데 왕의 총애를 받으며 천하를 호령하던 관리의 마지막 모습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소박하고 인간미 넘치는 모습이다.

어쩌면 성종이 말했듯 손순효는 정말 맨정신(?)으로 있을 때보다 취중에 더욱 맑은 정신으로 자기 자신에 충실할 수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술을 좋아하되 결코 술에 지지 않고 자신을 다스리던 철저한 자기관리의 모범이다.

최근 우리 사회 고위공직자들이 술자리에서 폭행, 성추행 등으로 물의를 빚고 당사자도 불행하게 공직을 마치게 되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아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술로 망가진 영웅호걸들의 이야기는 많으니 새삼 최근에 그 빈도가 늘어났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사회의 윤리의식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뜻이겠다.

공직자들이 일부러 술과 싸우는 수련을 할 필요는 없겠지만 옛 선비들의 ‘수기치인’의 가치와 의미만큼은 각별히 새겨보아야 할 때다. 특히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상위 1%라면 이제는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것’이야말로 필수 자격조건으로 삼아야 할 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