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팽>

관리가 장사를 하면 백성은 무얼 먹고 살란 말이냐? 

김수팽(金壽彭)은 영조 때 호조에서 일을 하던 관리였다. 청렴한 성품을 가졌다고 전해져오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높은 벼슬을 지낸 데 비해 그의 관직은 한낱 서리(서울의 각관청에 둔 하급 관리의 하나)에불과했다.

따라서 그의 출생이나 가계 등 신상에 관한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조선 왕조 500년의 역사 속에서 보자면, 김수팽은 보잘것없고 영향력도 없는 아주 미미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관한 일화는 여러 기록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역사서 속에서 이름조차 찾아보기 힘든 인물에 관한 일화가 이 정도로 전해지는 것은 드문 경우로, 호조의 한 하급 벼슬아치에 불과했던 김수팽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훌륭한 성품의 소유자였는지 쉽게 짐작 할 만하다.

부패의 온상에서 청렴을 지키다
조선 시대의 서리는 품계상으로는 비록 낮은 직위였지만 관청의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중요한 위치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관청의 장(長)이나 고위 관리들은 행정의 방향과 요지를 결정할 뿐이었고, 그 구체적인 집행과 실무는 하급관리인 서리의 몫이었다. 따라서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그것이 제대로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아전들의 역
할이 올바르게 수행되어야 했다. 그런 만큼 서리의 업무는 백성들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럼에도 조선시대 서리들에 대한 대우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양해야 할 처자식이 있었던 그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재물을 마련하려 했다. 대부분의 실무가 서리의 권한이었기 때문에 결국 그들은 여기서 재물을 마련할 방도를 찾았다. 수령을 속이고 재주를 부려 양곡을 훔쳐내고 장부를 조작하는 것과 같은 아전들의 부패
가 바로 그것이었고, 이는 점차 조선 사회의 고질병이 되어갔다. 하지만 김수팽은 그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영조에게 칭찬을 받은 적이 있을 만큼 청렴하기로 소문난 인물이었다. 김수팽이 그의 아우 김석팽(金石彭)의 집을 찾아갔을 때의 일이다. 석팽 역시 아전으로서 선혜청(조세로 거둬들인 대동미와 무명인 대동목을 관리하는 관청)에서 창고를 지키는 일을 맡고 있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홀어머니 슬하에서 어렵게 살았는
데 성장해서도 어려운 살림은 쉽게 나아질 줄을 몰랐다. 김수팽이 동생의 집 근처를 지나가다 근황이 궁금해서 잠시 들러보려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마당에 십여 개가 넘는 항아리들이 주욱 늘어서있는것이었다. 김수팽이 동생에게 물었다.
“이게 웬 항아리들인가?”
“그게…제 처가 살림에 보태 쓰겠다고 염색일을 좀 하겠다고 해서…”

말인즉, 염색일을 부업으로 하기 위해 항아리에 물감을 담아놓았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원체 집안이 가난했던 데다가 서리에 대한 대우조차 좋지 못했으니, 부정부패를 저지를 것이 아니라면 부업을 해서라도 생계를 이어가야만 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형 김수팽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얼굴에 노기를 띠면서 항아리를 모두 엎어 깨뜨려버리고는 말했다.

“명색이 관리로 나라에서 녹을 받으면서도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염색일을 더 한단 말이냐?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살림을 꾸리면 될 것이지, 녹은 녹대로 받아먹으면서 이런 장사까지 해먹으면 더 가난한 백성들은 무얼 해서 먹고 살란 말이더냐?”

동생 김석팽도 형의 말을 듣고는 크게 뉘우쳤다.

이러한 김수팽의 청렴한 성품은 그의 홀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김수팽 형제가 어렸을 적에 어머니가 텃밭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호미 끝에 무언가가 닿는 소리가 들렸다. 계속 파보니 큰 솥이 묻혀 있었는데 그 안에 금은보화가 가득했다. 그러나 김수팽의 어머니는 이를 다시 묻어두면서 이야기했다.

“재(財)는 재(災)인지라, 무고히 큰 재물을 얻으면 자식들이 안일해져 공부에 힘쓰지 않을 것이요, 가난하게 자라야 돈의 가치를 안다.”
그러고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버리고 다시는 그곳을 찾지 않았다.
이러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니 자연히 청렴한 성품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재치와 용기로 임무를 완수하다
흔히 청렴한 사람이라고 하면 고집스럽고 융통성없는 인물이 떠오르곤 하는데, 김수팽은 단순히 청렴하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재치있고 과단성도 있는 인물이었다.

하루는 김수팽이 창고의 물품을 조사하여 정리하고 있었다. 그런데한 대신이 들어와서 곳간에 보관되어 있는 은바둑알을 보고 만지작거리더니, 자기 딸의 노리개를 만들어야겠다면서 슬쩍 몇 개를 집었다.

이를 본 김수팽은 은바둑알을 한웅큼 집어넣으면서 말했다.
“대감께는 따님이 한 분뿐이지만 저에게는 딸이 다섯이나 된답니다. 그러니 저는 대감보다 더 많이 집어가야 되겠습니다.”
그러자 대신은 무안함에 얼굴이 발개져서 집었던 바둑알을 다시 제자리에 놓았다.

또 한번은 급한 결재가 있어 판서의 집을 찾아간 일이 있었다. 그런데 마침 그 판서는 손님과 함께 바둑을 두고 있던 중이었다. 김수팽이 마당 한가운데 엎드려 큰 소리로 결재해줄 것을 청하였으나 판서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계속 바둑만 두었다. 다시 한번 결재를 청하였지만, 판서는 여전히 바둑만 두고 있을 뿐이었다. 한 시간, 두 시간을 기다려
도 판서는 결재해 줄 기미도 없이 유유히 바둑만 두었다. 기다리다 못한 김수팽이 한번 더 청하였지만 여전히 판서는 묵묵부답이었다. 이에김수팽은 벌떡 일어나 판서가 바둑을 두고 있는 마루로 뛰어올라 바둑알을 손으로 쓸어버리고 바둑판을 엎어버리고는 다시 마당으로 내려와 엎드려 아뢰었다.

“저는 죽을 죄를 지었으니 목을 베이더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백성을 다스리는 일은 잠시도 늦출 수 없고 하루도 멈출 수 없는 것이옵니다. 대감께서는 속히 결재를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자 판서가 바둑판을 구석으로 밀어놓고 서류에 결재를 하면서 말했다.

“자네도 바둑을 두어보게. 두던 바둑을멈추고 한눈팔기가매우 어렵다네. 거기누구없느냐? 이버릇없는서리에게술이라도한잔주거라”
이처럼 김수팽은 판서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재기와 과단성을 겸비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한 번은 영조가 한밤중에 내탕고(궁궐의 금고)에서 급히 2만냥을 지출하여 들여보내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있었다. 이를 들은 김수팽은 일이 아무리 급해도 절차는 지켜야 한다며 일부러 느릿느릿 움직였다.
여기저기 소속 관장의 집을 찾아다니면서 결재를 받다보니 어느새 새벽녘이 되었다. 김수팽이 왕궁으로 돌아오자 앞서 2만냥을 들이라는 명령이 취소되었다는 전갈이 와 있었다.
사정을 알고 보니 영조가 밤중에 한 궁녀에게 빠져서 분위기에 휩쓸려 2만냥을 내리려고 했던 것을 날이 밝고 차분히 생각한 끝에 명을 거두었던 것이다. 후에 영조도 김수팽이 늑장을 부린 꾀를 전해 듣고 잘했다며 크게 칭찬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