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가 화가 났다.
아침에 냉장고에서 모처럼 감자를 꺼내보니
감자가 없던 송곳니를 뿔처럼 불쑥 두 개나 내밀고
그 둘레로 지원군이 늘어서듯 군데군데 메롱하는
모습으로 조금씩 삐져나온 싹이 보인다.

하긴 화날 만도 하지
우리 집에 팔려 온지가 지난 늦가을 이건만
무심한 주인 덕분에 숨조차 맘껏 쉴 수 없는
냉장고 야채실에 갇혀서 눈길 한번 붙들지 못하고
한 계절을 훌쩍, 아니 한해 또한 넘겼으니
어찌 홧병이 나지 않으랴

감자의 껍질을 깐다.
지난 겨울 딱딱한 밤을 깍느라 손마디에 생긴 굳은살처럼
칼날이 무뎌질대로 무뎌져 껍질보다는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간다.

마음만큼이나 몸도 아픈 감자
칼을 쓱쓱 싹싹 가니
어느 칼잡이의 칼 가는 소리가 이보다 경쾌하랴
아침의 고요함을 칼 가는 소리가 조용히 가른다.

날이 선 칼날로 감자 껍질을 벗기니
뽀얀 속살을 살포시 드러내는 감자
오늘 아침 우리 식구의 입속에서 배어나는 웃음과 함께
살강 살강 씹힐 감자.

32번 국도를 타고 태안을 지나 서쪽 바다 맨 끝 부분이 모항, 흔히‘만리포’라 알려진 내 고향입니다. 숨막힐 듯 울창한 송림길을 굽이굽이 들어가면 ‘야~ 이런 오지에 마을이 있었구나' 하고 탄성이 절로 나옵니다. 내 고향은 나지막한 언덕 너머 파도소리 정겹고 한가롭게 나는 갈매기만큼이나 평화로운 마을입니다. 앞에 바라보이는 염전 사이 갈대숲이 날리는 곳에 갯벌바다가 있습니다. 동무들과 황게도 잡고 망둥어 낚시도 하던 곳이지요. 태안반도 일대는 청정지역이 공작새 날개처럼 펼쳐져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며 인근 천리포의 수목원은 지상 낙원을 연상시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지난 12월 관광 수입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고향 마을이 유조선 사고로 시커먼 기름 덩어리로 뒤덮였다는 방송 보도에 망연자실했습 니다. 고향에 계신 부모 형제들은 더욱 그랬겠지요. 어린 시절 멱 감으며 은모래에서 뒹굴고 놀았던 그 아름다운 바다를 빼앗겨 버렸으니 누구에게 하소연 하고 어떻게 되찾아야 한단 말인가요? 인간의 부주의가 바다 속의 생명까지 휩쓸었으니 후손들에게 남겨줄 그 무엇이 있단 말인가요?
언론에서는 대책은 뒤로 한 채 연일 죽어가는 바다를 흥미거리 삼아 내보내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큰 사건이 터질 때마다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주인 없는 약속이 뒤를 잇더군요. 이번 사건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전국에서 자원봉사자가 태안 앞바다로 달려가 방재작업을 하는 모습을 보고 감격의 눈물이 났습니다. 상처 입은 바다와 바위돌을 어루만지며 역한 기름냄새를 마다하지 않고 자연을 살리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에서 우리가 한 가족임을 알았습니다. 죽음의 바다가 자원봉사자의 땀과 열정으로 조금씩 예전 모습을 찾아가는 것을 보면서 내 고향 사람들은 깊은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주민들의 생활터전이 돌아오기엔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겁니다. 100만의 자원봉사자가 다녀갔어도 모항 주변의 바위틈에는 기름 냄새와 기름덩어리가 남아 있습니다. 혹시 주민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환경재앙을 복구하였던 태안 앞바다를 자연을 지 키는 현장교육의 장으로 만들었으면 합니다. 자원봉사가 아니더라도 국민 모두가 고향처럼 모항, 만리포를 찾아와 주시고 사랑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