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상자 안에서
감자, 콩, 마늘종, 된장, 장아찌를 꺼내
방안에 늘어놓고 나니
고향집 마당이 들어앉은 듯
마음이 넉넉해져 온다
방안이 온통
고향냄새로 그득하다

윤기 자르르 흐르는 깻잎장아찌는
잃어버린 식욕을 당기고
고향의 흙냄새 물큰한
감자 한 알 한 알에는
어머니의 땀방울이 송송 박혀있다
꾹꾹 눌러 담은 된장 위에
선명한 어머니의 손자국
된장을 퍼 담으며
입가에 환한 웃음 피우셨을 어머니
깊은 항아리 속 곰삭은 사랑의 무게로
내 마음속에 환한 등불
밝혀주시는 어머니

큰 산처럼 우뚝한 그 사랑 앞에
내 모습은 왜 이렇게
작아져만 가는지

오늘은 인근 아파트에 장이 서는 날입니다. 슈퍼마켓이나 할인점보다 야채가 싱싱하고 값도 싸서 종종 장터를 찾곤 합니다. 일주일 치 찬거리를 살 셈으로 시장바구니를 들고 오후 무렵 장터로 향했지요.
따사로운 봄볕이 내리쬐는 장터엔 활력이 넘칩니다. 연신 손님을 부르는 장사꾼들과 한 푼이라도 싼 값에 좋은 물건을 사려는 손님 사이의 흥정이 봄날 오후를 사뭇 달궈놓네요. 과일과 생선을 산 후, 차도 옆 노견으로 향했지요.
길가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계신 할머니 몇 분이 저를 보고 먼저 아는 체를 하시네요. 할머니들 앞엔 들녘에서 갓 캐온 봄나물이 수북이 쌓여 있습니다. 보기에도 퍽 실해 보이는 냉이와 시금치, 씀바귀와, 연초록 새순이 먹기 아까울 정도로 고운 원추리도 있네요? 뿐인가요, 집에서 직접 기른 무공해 콩나물과 깻잎장아찌, 무짠지, 묵은 김치까지 내온 할머니도 계십니다. “어머, 할머니. 벌써 원추리가 나왔네요? 살짝 데쳐 초고추장에 무쳐 먹으면 맛있겠다!”
오랜 단골이라 그럴까요? 할머니들이 꼭 친정어머니만 같습니다. 그래서 나물을 사러 갔다가도 길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수다를 떨곤 하지요. 저의 호들갑스런 말에 할머닌 주섬주섬 짐 보따리에서 뭔가를 꺼내시더니 제 앞에 펼쳐놓으십니다. 보니 점심도시락이네요. 할머닌 그렇잖아도 원추리를 살짝 데쳐 고추장에 조물조물 무쳐왔다며 맛 좀 보라고 하십니다. 아직 점심 전이면 한술 뜨고 가라고까지 하시면서요.
새콤한 봄나물에 잃었던 미각이 살아나고 문득 고향에 계신 친정어머니 생각이 납니다. 아마 시골에 계신 어머니도 지금쯤 봄나물을 캐어 함지에 이고 오일마다 열리는 장터로 향하시겠지요. 우리가 어릴 적, 막 봄이 시작될 무렵엔 먹거리가 귀할 때였어요. 지난 가을에 수확한 양식이 바닥날 때라 한 푼이 아쉬운 어머니는 종종 봄나물을 머리에 이고 장터에 팔러 가셨거든요. 가끔은 어머니의 푸념을 감수해가며 장터까지 따라가곤 했지요. 장터 한켠에 자리를 마련하고 지나는 손님들을 부르던 어머니,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제발 손님들이 엄마 물건을 죄다 사주기를 바랬던 기억이 납니다.
봄나물을 판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동태도 사고, 우리들 학용품도 사고 차비 몇 푼이 아까운 엄마를 따라 걸어서 돌아오던 어린 날의 추억이 아지랑이처럼 피어납니다. 그래서 그런지 할머니들을 뵈면 꼭 어머니를 뵙는 것 같아 나물만 사고 그냥 돌아서기가 아쉬운가 봅니다. 할머니께 나물 사천 원어치를 사니, 덤으로 나물을 몇 움큼이나 담아주십니다. 덕분에 우리 집 식탁은 봄의 들녘처럼 풍성해질 것 같습니다.
할머니, 오래오래 건강하셔서 저희들에게 고향의 봄을 맛보게 해주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