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지하철을 타고 엄마와 함께 탑골 공원에 간 적이 있었다. 나는 기껏해야 10살밖에 되지 않았었기에 ‘다른 건 몰라도 정말 비둘기가 많은 곳’이라며 즐거워했다. 비둘기를 쫓으며 놀다가 문득 이상한 기분을 느꼈던 것 같다. 평화롭다 못해 고요한 주변, 어쩐지 모를 적막함. 그제서야 주변에 아이라곤 아무도 없음을 알아챘다. 비둘기 떼만큼이나 많은 노인들만 아무렇게나 앉아 쉬고 있었다. 어쩐지 즐거움이 가셔버렸고 울먹거리고 싶어져 엄마 치마에 매달리려는 순간, 한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노인의 슬픔을 처음으로 배웠던 것 같다.
그 눈동자에 가득 담겨있던 애수, 슬픔, 외로움. 나는 조용해졌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에 도착했을 때 엄마에게 물어보았다. 탑골 공원의 ‘탑골’은 죽은 할아버지들의 뼈를 말
하는 거냐고. 그래서 자기 친구들의 뼈로 지어진 공원에 있어 노인들이 그렇게 슬퍼 보이는 거냐고. 물론 엄마는 깔깔 웃었다.
그 뒤 오 육년 후 우연히 탑골 공원을 다시 가게 되었다. 탑골공원은 마치 시간이 멈춰 있었던 듯 똑같은 풍경이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 순간, 또다시 어느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쳤
다. 그 눈의 슬픔마저 어떻게 그렇게 똑같은지…. 그 날은 시간마저 멈춰 버린 듯한 그 공간을 오랫동안 서성이며 노인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노인의 삼고(三苦)’라는 것이 있다. 사람이 늙어 겪는 세 가지 고통을 말하는데, 경제적 능력의 상실인 ‘빈곤’, 신체 기능의 약화인 ‘질병’, 젊은 세대에게 사회를 넘겨준 후 홀로 느끼는 ‘소외’가 그것이다. 이 세 가지 고통들은 늙어 구부정하게 굽은 등을 무겁게 내리누르고 시름시름 마음의 병을 앓게 한다. 신체 기능이 약해지는 것은 자연의 순리이고 젊은 세대가 사회를 이끄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 그러나 빈곤은 사회의 문제로서 사회가 해결해야 한다. 국민이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탄생한 것이 국민연금 제도이다.
그러나 현재의 국민연금 제도는 그 운용에 있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는 한국이 빠르게 저출산·고령화 사회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19년 후인 2026년에는 노인인구(현 전체 인구의 약 10%)가 2배가 될 것으로 예상되며 출산율마저 낮아지고 있으므로 그 심각성이 더해지고 있다. 세금을 낼 수 있는 인구의 수가 점점 적어지므로 지금까지의 연금 제도가 그대로 유지된다면 머지않아 연금 기금이 완전히 고갈된다. 젊은 날 열심히 모아 늙어 편안히 사는 것도 이제는 보장되지 않는다. 늙음에 대한 두려움, 저소득층의 불안이 하늘을 찌를 것이며 전체적인 복지가 날이 갈수록 형편없이 떨어질 것이다. 연금 정책의 시정이 시급하다.
최근 통과한 연금 개정법은 이러한 우려를 내포하고 있다. 급여액을 낮추고 혜택의 범위를 넓히는데 초점을 맞춘 개정법인데 이는 앞서 말한 기금 고갈을 십여년 늦추며 연금 사각지대에 있는 노인들에게 혜택을 주기 위한 정책이다.
개정법대로라면 내가 지금 17살이니 한창 연금을 받아야 할 2065년 즈음에는 기금이 고갈될 것이다. 그러나 현 개정법을 무조건 부정할 수도 없다. 애초부터 적게 내고 많이 받는다는 어려운 슬로건을 걸고 시작한 제도였기에 기금이 고갈되지 않으려면 가입자의 지속적인 증가가 있어야 했는데 고령화 사회에 들어서며 연금 시스템의 동력 엔진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이 기금 운용의 불안함과 관련되어 있다. 일단 현재 통과시킨 개정법으로 추가적인 16년을 벌어둔 후 국민의 강한 불신을 씻을 방법을 찾아야한다. 기금 고갈은 현실이고 그것을 미루는 정책은 말 그대로 임시방편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예컨대 기금 운용에 있어 재정경제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현재 기금 운용은 보건복지부의 금융 전문가들이 하고 있지만 재정경제부의 지원이 있다면 더욱 효과적인 이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세계적인 금융사에 기금 운용을 맡길 수도 있다. 이와 같이 다방면에 걸쳐 효과적인 도움을 구할 방법을 생각해내야 한다.
일반 국민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국민연금은 기초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정도에서 폭넓게 주어지는 것이 적절하다. 정부의 목적은 효율성보다는 형평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기 때문이다. 혹 국민연금이 너무 적다 싶으면 개인연금 등으로 충분히 개인적인 준비가 가능하다. 이미 많은 복지선진국들이 초고령 사회 진입으로 큰 타격을 입고 비틀거리고 있고 이 오래된 클리셰(Cliche)보다는 3층 보장제를 권장하는 편이다. 따라서 무조건 선진국이 채택하고 있는 것이라 해서 갖다 쓰는 것이 아니라,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고, 고칠 것은 고치는 자세가 필요하다. 예를 들면 국민연금, 기업연금, 개인연금의 3층 보장제를 넘어 의료보험, 기초생활보장 등을 포함하는 보다 넓은 의미의 사회보장제를 실시하는 것도 생각해 볼만하다.
얼마 전에 학교 수학여행으로 유럽의 각국을 여행한 일이 있어 산마르코 광장을 들렀다. 흰 비둘기 몇 백 마리가 한꺼번에 날아오르는 그 광장을 보니 파고다 공원이 생각났다. 이곳은 무료 배식을 받는 노인도, 이발 봉사를 받는 노인도 없구나. 어딜 가도 삼고(三苦)에 지친 노인의 눈동자는 없구나. 유럽의 복지 정책을 새삼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인도 결국 인간 아니겠는가. 나는 경제적 능력도 없소, 몸도 약하오, 사회에서 밀려났소, 난 어디로 가란 말이오, 하며 자신의 존재 자체에 느끼는 회의는 이제 마악 사춘기에 들어선 청년의 혼란스러움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나는 그 노인의 모습에서 나 자신을 보았다. 우리 사회가 피해갈 수 없는 그리 멀지 않은 미래를 보았다. 우리가 조금만 더 빨리 준비하고, 화내지 않고, 참고, 시대의 큰 그림을 본다
면 국민연금에 대해 조금 더 너그러워질 수 있을 것이다. 젊은 우리의 너그러움에 훗날의 노인들은 미소로 답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미소 지으며, 가볍게 속삭일 수 있도록. 안
녕, 삼고(三苦). 안녕, 쓰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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