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쌈짓돈
제11회 국민연금 수급자 생활수기 공모전 - 우수상 이주희
오늘은 즐거운 토요일. 아침부터 우리 가족은 부산하다. 오빠는 한껏 멋을 내고 엄마는 부엌에서 반찬을 챙기시고 아빠는 할머니 댁에 가서 작업할 연장을 챙기면서 분주하다. 나 역시 어떤 옷을 입을지 이것저것 골라보다 맘에 드는 옷을 입고 단장을 했다. 드디어 준비 끝.
대전에 계신 외할머니를 찾아가는 날이다. 매주 주말마다 찾아뵈었는데 세종시로 이사오면서 자주 가질 못한다. 그래서 오늘은 기분이 더욱 들떠있다.
할머니는 9년 전부터 파킨슨병을 앓고 계셔서 몸이 많이 불편하시다. 그래서
요양보호사 아주머님이 매일 방문해서 돌봐주신다.
부모님은 직장에 다니시고 외삼촌들도 외지에 있다 보니 항상 혼자 생활하시는 할머니가 안쓰럽고 또 죄송하다. 외할머니는 우리가 가는 날이면 항상 일찌감치 나와 2층 베란다에서 떨리는 손으로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해주신다.
오늘도 어김없이 할머니는 2층 베란다에서 “우리 손자손녀 얼른 오너라” 하시며 야윈 모습으로 손짓하신다. 나는 할머니를 부르며 단숨에 2층까지 달려가 할머니에게 안겨 없는 애교를 부리고 오빠는 듬직한 인사로 모든 마음을
전한다.
할머니와 함께 식사도 하고 이야기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엄마가
또 할머니께 한소리 하셨다. 돈 아끼지 말고 아주머니한테 과일도 사오라고
시키고 그릇을 들어 보이며 이런 것은 버리라고 하셨다. 할머니는 쓸 만한 것을 아깝게 버리라고 한다며 화를 내신다. 내가 아파서 너희들 속 썩이고 돈도
많이 쓰는데 아껴야지 하시면서…,
할머니는 여윳돈이 없으면서도 나와 오빠 용돈은 항상 챙겨 놓으신다. 오늘도 떨리는 손으로 쌈짓돈을 꺼내시며 “이걸로 맛있는 거 사먹고 학용품 사서써.” 하고 말씀하신다. 어릴 적에는 “네 할머니”하며 덥석 받았으나 고등학생이 되어 보니 “아니에요. 할머니 저 돈 있어요.”하며 거절하게 되었다. 그러자
할머니께서 “할머니 돈 많아. 매달 연금 나온다.” 하신다. “정말 할머니 연금 받아요?”하고 여쭤보자 그때부터 할머니의 자랑이 시작되었다.
당연히 부모를 봉양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국가가 지급·보장해주는 국민연금이야말로 효자 중에 효자일 수밖에 없다.
너희 엄마가 처녀시절 국민연금을 불입해줘서 이렇게 너희들 용돈을 줄 수 있는 거라고 엄마의 칭찬을 끝없이 하시는 할머니. 그 칭찬의 원천은 국민연금이었다. 할머니의 통장으로 매달 들어오는 연금. 엄마 말씀이 최소금액으로 5년 납부하고 현재 할머니 연세가 80세이신데 지금까지 물가가 조금씩 오를 때마다 인상되어 계속 받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후회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때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으면 더 많은 금액을 불입했을 텐데 하며.
외할머니가 국민연금을 받고 계셔서 엄마는 할머니 용돈을 국민연금으로 대체했다고 하셨다. 친할머니도 혼자 생활하시는데 아빠는 형제들과 함께 할머니의 생활비를 충당해드리고 있다. 엄마 아빠가 결혼하셨을 당시에는 친할머니가 가입대상인 60세를 넘기셔서 국민연금에 가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부모님 용돈 얘기를 하실 때면 어깨를 으쓱하시며 아빠에게 말씀하신다. “자기는 뭐 한거야, 어머니 국민연금도 가입 안 해 드리고. 그러니까 우리가 매월 용돈 드리는 게 부담 되지.” 아빠는 아무 말씀도 못하신다. “그래 내가 잘 몰라서 그랬다.” 그러면서 웃으신다.
가끔 뉴스에서 들려오는 국민연금 소식은 조금은 부정적인 이야기들이다. 또한 부모님 모임에 가끔 따라 나가면 월급에서 원천 공제하는 국민연금과 건강보험에 대한 불만도 들을 수 있다. 그럴 때면 엄마는 항상 국민연금 지킴이처럼 노후준비의 필요성에 대한 얘기를 시작으로 끝에 할머니 이야기를 꼭 한다.
얼마나 수익성이 좋은 제도이며 꼭 필요한 노후대책인지를 몸소 느낀 것을
실감나게 이야기하시면 모임에 계셨던 분들의 불만이 조금씩 수그러지는 것을 본다. 엄마 덕분에 나는 자연스레 국민연금에 대한 인식을 좋게 갖고 있는
차세대주자이다. 내 곁에 가장 가까이 계시는 할머니를 보면서 이런 제도를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해서 혜택을 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서 이렇게 부족하지만 용기 내어 우리 할머니 이야기를 글로 쓰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는 고령화시대로 접어들었고 초고령화시대로 가는 길목에 있다. 하지만 국민들의 노후대책 인식은 낮고 노후대비는 너무 미미하다. 당연히 부모를 봉양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국가가 지급·보장해주는 국민연금이야말로 효자 중에 효자일 수밖에 없다. 우리 부모님은 두 분 다 직장에 다니신다. 그래서 월급에서 국민연금을 꼬박꼬박 납부하고 계신데 난 그런 모습이 너무 좋다. 먼훗날 우리 엄마 아빠의 노후를 국민연금이 책임져 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안심되고 행복하다. 자녀로서 부모님 부양 의무를 조금이나마 덜어 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다. 나에게 국민연금은 할머니의 쌈짓돈처럼 든든한 비상금이며 나를 대신해줄 효녀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