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웹진 2008년 7/8월호

“엄마, 텔레비전 볼륨 좀 줄여.”

“뭘 또 잃어버리고 그렇게 찾는 거야. 벌써부터 그러면 할머니 되면 어쩌려구 그래.”
“엄마, 그릇이 왜 이렇게 미끌거려? 설거지를 이런 식으로 하면 어떡해?”
이제 초등학교 3학년 된 딸아이 잔소리다. 기도 안 찬다. 남들보다 책도 많이 읽고, 공부도 잘 해서 오냐오냐 해 줬더니 이젠 엄마 알기를 아주 우습게 안다. 사춘기가 조금 일찍 오는 것 같아서 나도 조심하고 웬만하면 받아넘겼다. 화내고 윽박지르면 오히려 상처 나고 삐뚤어질까봐, 까탈스럽고 신경질적인 딸애 눈치만 보고 살았다. 가끔은 정신과에 같이 가봐야 하는 건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도 해봤지만, 기우이길 바랐다.
“너 언제까지 텔레비전 볼 거야? 밤 열시 이후에 텔레비전 안 보기로 약속했어, 안 했어?
“왜 나한테 화풀이야?”
화풀이 맞았다. 이번 달 월급이 조금 늦어진다는 남편 전화를 받고,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월급이 늦어져서 짜증나는 게 아니라, 그런 이야기를 그렇게 전화기에 대고 소심하게 말하는 남편이 마땅치 않았다. 그렇게 말하면 다음 달 딸애 학원비랑 자동차 할부금이 나오냐고 소리를 지르고 끊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고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딸아이에게 그 화살이 옮겨진 것이다.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그렇게 소리 지르고, 일방적으로 집안 분위기 나쁘게 하면 아빠가 집에 들어오고 싶겠어? 아빠도 불안하니까 전화한 거 아니야. 그러니 아빠가 매일 늦는 거야. 집이 싫은 거라고.”
“짝!”
순식간이었다. 내 손이 딸아이의 뺨을 사정없이 올려치고 말았다. 딸아이는 나를 째려보더니 금세 닭똥같은 눈물을 흘렸다. 나도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체벌을 하더라도, 늘 따로 장만해둔 회초리로 절도 있게 종아리만 때렸던 나였다. 그건 내가 가진 삶의 중요한 원칙이기도 했다. 폭력적인 친정아버지 밑에서 괴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내 자신과의 약속이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어릴 적 아버지 모습을 닮아가고 있는 것이다
“미, 미안!”
뽀얀 볼이 빨갛게 부풀어 올랐다.
“엄마랑 말 안 해!”
쾅 소리를 내며, 딸아이는 그렇게 자기 방으로 사라졌다. 한 십 분 정도 홀린 듯이 서있었다. 폭력은 때린 사람에게도 상처다. 내 스스로가 용서되지 않았다. 정말 딸아이의 말이 맞을지 모른다. 신경질적이고 감정적인 내 태도 때문에, 남편 역시 상처받고 지쳐있는지도 모른다. 텔레비전에서 윙윙거리는 광고를 우두커니 보고 있었다.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누군가에게 기대 엉엉 소리내며 울고 싶었다. 엄마라는 거 내가 해도 되는 걸까? 그냥 도망가 버리고 싶다. 엄마 안 하고 그저 딸로 평생 살고 싶었다. 어릴 적 늘 참고 양보하던 엄마가 그렇게 답답하더니 내가 그 벌을 받는 거다. 아니다. 더 깊게 생각하다 보면 일만 커질 뿐이다. 먼저 화해를 구하는 거야. 어른이라도 잘못한 건 잘못한 거니까. 그리고 이야기로 풀자. 그래야지.
“나, 들어간다.”
문을 열자 딸아이는 예상대로 침대에 엎드린 채 흐느끼고 있었다.
“엄마가 잘못했어. 다신 그런 실수 안 할게. 약속.”
딸의 등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아이 몸의 열기가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아이가 울음을 멈췄다.
“아냐, 엄마. 내가 미안해. 엄마라고 화내고 싶어 냈겠어? 내가 사춘기라서 그런가 봐. 유난 떨어서 미안. 내가 버릇없는 거 나도 알아. 엄마가 조금만 참아줘. 나도 이런 내가 싫지만 어른이 되려면 어쩔 수 없는 거잖아. 그렇지? 엄마, 정말 미안해. 내가 내 맘대로 안 돼. 엉엉.”
그리고 딸아이는 예전의 그 조그만 아이가 되어 나에게 안겼다. 딸아이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로 나 역시 눈물을 흘리면서, 언젠가는 이 딸이 내 눈물을 닦아줄 든든한 어른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딸에서 친구로, 그렇게 성장통을 겪고 있는 한 아이를 그렇게 꼭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