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의 푸른 빛이 썩 잘 어울렸다. 영화제가 한창이던 지난 5월, 프랑스 칸에서 만났던 배우 이병헌(38)이 요트가 늘어선 칸의 해안을 뒤로 하고 포즈를 취하자 취재진들 사이에서는 가벼운 탄성이 흘렀다.
중절모를 가볍게 머리에 얹고 가벼운 재킷차림으로 나타난 이병헌은 어느 해외 언론의 소개대로 ‘한국의 알랭 들롱’이란 평이 무색치 않아 보였다. “영화 찍는 것도 힘들었지만 칸영화제 일정을 맞추는 게 더 힘들었어요. 칸에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의 초청이 결정된 후 영화제 개막 3개월 전부터 파라마운트와 협의했는데 도저히 시간을 뺄 수 없어 수없이 간다 만다 했었죠.
어제 촬영 끝나고 시간이 없어서 뻘건 피 분장만 지우고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비행기에 탔습니다.” 이병헌은 5~6월 내내 할리우드영화 ‘지 아이 조(G.I.Joe)’ 촬영에 매달렸다. ‘놈놈놈’이 칸에 공식 초청됐음에도 촬영 때문에 짬을 내기 어려워 참석이 무산될 뻔했다. 파라마운트에서는 전세기를 내주는 방안도 검토했다가 간신히 비행 스케줄을 맞췄다.
체코 프라하에서 찍은 ‘지 아이 조’에서 이병헌은 주연급 조연으로 출연한다. ‘지 아이 조’는 ‘트랜스포머’로 유명한 완구회사 하스브로의 액션 피겨 시리즈이자 미국 굴지의 출판만화 회사인 마블 코믹스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다. 할리우드에서도 최고의 제작비가 투입되는 블록버스터로 이병헌이 맡은 역은 닌자 캐릭터 ‘스톰 쉐도’다. 1990년대를 한국 최고의 청춘스타로 보냈고 세기를 넘어서는 한류스타(배용준, 장동건, 원빈과 함께 한류 4대 천왕으로 꼽힌다)로 범아시아적 인기를 누렸던 이병헌은 할리우드 진출로 연기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찍은 200억짜리 블록버스터 한국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과 미국-프랑스 합작영화인 트란 안 홍 감독의 ‘나는 비와 함께 간다’, 할리우드 진출작 ‘지 아이 조’는 현재의 이병헌에게는 ‘배우 이력의 정점’이다. 첫 출발은 7월 17일 개봉하는 ‘놈놈놈’이다. “이제까지 악역을 해 본 적이 없어요. 언젠가 한 번은 하겠지 막연하게 생각했었는데 막상 해보니 기분이 묘하더군요. 어떻게 하면 지옥 구덩이에서 살아남은 것 같은 악인을 연기할까 고민을 많이 했죠. 몸은 큼직한 근육보다는 깡마른 몸매에 갈래갈래 찢어진 잔근육들이 많아야 어울리겠다 싶었죠. 피도 눈물도 없이 잔혹해 보이지 않을까 말이에요.”
영화 촬영 전 승마를 연습하다 발목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해 출연을 포기할까도 했지만 ‘달콤한 인생’에도 함께했던 김지운 감독과의 신뢰가 그를 버티게 했다. 다리 깁스를 하고는 상체 근육을 키웠다. 승마도 ‘속성’으로 배웠다. “말이라곤 어렸을 때 민속촌에서 조랑말을 타본 게 전부지만 승마조교가 나보고 운동신경이 발달했다고 하던데요? 거울을 보면서 ‘역시 나는 대단해, 뭐든 잘해’라고 생각했어요.”라며 농담도 던지지만 “배우는 구보만 배우면 되지 경마처럼 달리는 습보는 배울 필요가 없다, 스턴트맨이 다한다고 하길래 시작했는데, 실제 촬영에서는 다 경주마처럼 뛰더군요. 정말 무서워요.”라며 솔직한 속내도 비친다.
‘놈놈놈’은 1930년대말 만주를 배경으로 한 보물지도를 놓고 세 명의 남자가 쫓고 쫓기는 액션영화다. ‘좋은 놈’정우성은 장총을 들고 말을 타며 범죄자를 쫓는 현상금 사냥꾼으로 망토를 휘날리는 멋들어진 총잡이. 군고구마 장사 같은 방한모자에 군복을 대충 차려입은 송강호는 말도 많은 떠벌이에다 우스꽝스럽고 어설픈 열차강도이지만 누구보다 끈질긴데다 알 수 없는 속내를 가진 ‘이상한 놈’. 이병헌은 한쪽 눈을 가린 날카로운 헤어스타일에 항상 댄디한 블랙수트를 차려입고 잔혹한 살인을 저지르는 마적단 두목이다. “최고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인물이죠. 최고에 목숨 걸고 남들보다 질투심이 많으며 내성적이고 작은 것에 집착하는 캐릭터예요.”
칸에서 먼저 선보인 ‘놈놈놈’에서 이병헌이 보여주는 악한의 카리스마는 대단했다. ‘레옹’에서 악한이었던 게리 올드만을 연상케할 정도로 소름끼치는 연기를 보여준다. 칸에서 만난 프랑스의 한 영화사 관계자는 “이병헌과 송강호의 연기는 매우 입체적”이라고 말했으며 일본의 한 잡지사 기자는 “이병헌의 냉혈한(cold-blooded) 연기가 정말 훌륭했다”고 평했다. ‘놈놈놈’은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 앙상블과 거침없이 질주하는 액션 신, 해외관객까지도 배꼽을 잡게 만드는 유머로 칸 현지에서 ‘완벽한 오락영화’라는 평을 받았다.
1992년 데뷔해 올해로 16년 차에 이른 이병헌. ‘스타’로 출발해 ‘배우’로서 완성돼가고 있는 그는 오는 10월부터는 강제규 감독이 연출하는 대작드라마 ‘아이리스’ 촬영에 들어간다. 잠깐의 숨 돌릴 틈도 없는 바쁜 행보에 화제작과 대작이 이어져 긴장조차 늦출 수 없는 스케줄이다. 지금이 인생의 ‘터닝포인트’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그는 “바쁜 상황 지나서야 그때는 왜 그랬을까, 정말 잘했다 하는 생각이 들 듯, 지금은 그냥 정신없는 상황”이라며 “다만 내가 가는 행보가 팬들에게 정말 의외다, 평소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생각을 줄 수 있도록 더 늦기 전에 이것저것 해보고 싶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