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웹진 2008년 9/10월호

“기기김치 좀 주세요.”
“김치 셀프, 셀프 몰라요? 아이엠 비지. 바쁘다고요!”

어수선하던 영애네 식당에선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걸걸하고 소란스럽던 인부들조차 식사를 멈추고 모두 영애와 눈이 파란 서양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가뜩이나 눈이 큰 서양 남자는 큰 눈을 껌벅일 뿐이었다.
“미, 미안해요. 아이엠 쏘리합니다.”
그렇게 수습을 하고 그는 다시 밥으로 시선을 돌렸다. 후회가 되긴 했지만, 신경을 쓰기엔 너무 바빴다. 아직도 밀린 주문이 세 테이블이 넘었다. 배달간 아르바이트생은 함흥차사에, 주문전화까지 울리고 있었다. 어제부터 일을 시작한 주방 아주머니는 김치찌개 뚝배기를 바닥에 쏟았고, 인근 공사장 인부들은 보통 때보다도 일찍 들이닥쳤다. 스무 명이 넘는 손님이 좁은 식당에 바글거렸고, 그 와중에 금발의 덩치 큰 서양 남자는 테이블 하나를 혼자 차지하고 눈치 없이 영애를 성가시게 하고 있었다. 이 남자의 이름은 스콧. 캐나다에서 온 영어 선생님이자 딸 아이 수진이가 다니는 영어 학원 선생님이다. 수진이가 워낙 따르고, 외국 선생님과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대견해서 식사를 한 번 대접했었다. 그게 인연이 되어 스콧은 일주일이 멀다하고, 영애네 김밥집을 찾았다.
채식주의자여서 야채 김밥이나 비빔밥을 좋아했다. 매운 걸 잘 못 먹어서, 고추장은 티스푼으로 한 스푼 정도만 넣어서 비벼 먹었는데, 그 모습마저 어딘지 모르게 순수하고 귀여워 보였다. 덩치는 산만한 성인이 아이처럼 쩔쩔매는 모습을 보면서 괜히 안 되어 보이기까지 했다. 다 집에서는 귀한 자식일텐데, 저렇게 먼 나라에 와서 외롭게 산다고 생각하니 남일 같지가 않았다. 남동생 같고, 조카 같았다. 항상 무언가 더 챙겨주고 싶었다. 가족끼리 먹으려고 만들었던 밑반찬도 더 챙겨주었다. 채식주의자들이 좋아하는 반찬이 무얼까 인터넷도 뒤져보고, 그가 올 시간에 맞춰서 일부러 더운밥을 짓기도 했다. 스콧도 그런 영애의 마음이 고마웠는지 딸 수진이를 데리고 슈퍼마켓에 가서 초콜렛이나 아이스크림을 사주며 어울렸다.
“엄마, 스콧 선생님이 엄마 예쁘대.”
화이트 데이날 딸아이가 장미꽃 무늬가 들어간 사탕을 영애에게 내밀었다. 영애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주방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눈치라도 챌까봐 서둘러 사탕을 받아들었다. 예쁘다는 말 싫어할 여자 없지만 혹시 남편 없이 혼자 사는 여자라고 너무 만만하게 본 게 아닐까? 불쾌하고 낯 뜨거웠다. 자신이 너무 오버해서 친절했던 걸까? 자신을 좋아한다고 오해라도 한 걸까? 이 소문이 퍼지면 아이가 놀림감이 될 수도 있다. 교통사고로 작년에 저세상 사람이 된 남편에게도 미안했다. 너무 예민하게 군다고 할 수도 있지만, 쉽게 무시되질 않았다.
그날 이후로 스콧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주문한 메뉴만 주고는 시선을 피했다. 일부러 주방에 들어가서 나오질 않았고, 될 수 있으면 거리를 두려고 애썼다. 그러다가 결국 바쁜 점심시간에 김치 달라는 이 남자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만 것이다. 짜증을 낸 순간은 짧았지만, 밀려드는 후회와 상처는 컸다. 스콧은 테이블에 조용히 식사 값을 올려놓고 사라졌고, 그 이후로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경솔하고, 무례한 행동이었다. 영애는 수도 없이 반성하고, 뉘우쳤지만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랐다. 영어라도 잘하면 전화라도 해볼텐데. 짧은 단어로 ‘쏘리’만 연발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집으로 찾아가는 건 더더욱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하나? 맞다. 그가 잘 먹는 잡채를 만들어서 딸아이 편으로 보내자. 그것만큼 자연스런 화해법도 없을 것이다. 좋은 생각이다. 그래서 정성을 들여 잡채를 만들고, 유리로 만든 예쁜 찬합에 담았다.
“엄마, 스콧 선생님 캐나다로 떠났어. 내가 이야기 안 했어? 꽤 됐는데.”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멍했다. 그 날 스콧은 마지막 인사를 하러 왔던 것이다.
“스콧 선생님 누나가 한국인 입양아였대. 그 누나랑 엄마랑 닮았다고 그랬어. 누나도 엄마 닮아서 예쁘다고. 그런데 그 누나가 어릴 때 아파서 일찍 죽었대.”
딸아이는 찬합의 잡채를 젓가락으로 집어 먹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한국에 온 거래. 누나의 나라, 누나가 그렇게 오고 싶어 했던 나라 말이야. 마지막 날 떠날 때 학원 친구들 다 울고불고 난리 났었잖아. 우리 학원에서 인기도 제일 많았는데….”
영애는 못 들은 척 싱크대 물을 틀어놓고, 멀쩡한 그릇을 다시 쏟아내고 설거지를 시작했다.
주책맞게 흐르는 눈물을 들키지 않기 위해, 물을 좀 더 세게 틀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