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체스판을 들여다보 고 있다. 상대의 압박이 보통이 아니다. 자신의 수를 빤히 읽고 있는 것 같다. 이래선 가망이 없다.
정적을 깨고 갑자기 공이 울린다. 사내는 황급히 체 스판을 박차고 일어나 손에 글러브를 낀다. 링 위에 올라서자마자 사내는 상대에게 가벼운 잽을 날리며 탐색전을 벌인다. 운동신경이 뇌신경만큼 예민하진 못한 것 같다. 빈틈을 놓치지 않고 상대의 턱에 오 른손 어퍼컷을 작렬시킨다. 체스판에서 기세등등하던 상대는 이 한 방에 맥없이 무너진다.
현재 체스 세계챔피언은 비슈와나단 아난드(38, 인도)다. 그러나 아무리 세계챔피언이라 해도 쉽게 오 르지 못 할 나무가 바로 `체스복싱’이다. 체스복싱은 라운드를 번갈아가며 체스를 두다가 복싱을 하는 이색 스포츠다.
경기는 체스 6라운드와 복싱 5라운드 등 총 11라운드로 이루어져 있다. 독특한 경기 방식 덕분에 유럽에선 이미 상당한 고정팬을 확보하고 있다. 체스는 라운드 당 4분, 복싱은 2분이고 각 라운드 사이에 1분 휴식시간이 있다. 1라운드는 체스로 시작한다.
선수들은 머리를 싸매며 체스를 두다가 공이 울리면 글로브와 마우스피스를 끼고 상대의 얼굴에 주먹을 날려야 한다. 제아무리 두뇌 회전이 빠른 체스 챔피언이라 해도 웬만한 맷집이 아니고선 타이틀을 따기가 쉽지 않다.

체스복싱에서 승부를 내는 방법은 네 가지다. 우선 복싱 라운드에서 상대를 KO로 제압하는 것, 그리고 체스 라운드에서 체크메이트를 하는 것이다. 승패를 가리지 못한 채 11라운드가 끝나면 심판 판정에 의해 승자를 가린다. 여기서도 동점이 될 경우엔 체스 라운드의 후순위자가 이긴다. 마지막으로 경기 도중 상대가 체스 제한 시간(12분)을 모두 소진했을 때도 승리가 인정된다.
체스복싱의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네덜란드 출신의 엔키 빌랄이라는 만화가다. 그는 1992년 자신의 그래픽 소설에 체스복싱의 모태가 되는 발상을 처음 소개했다. 이후 네덜란드의 행위예술가인 아이에페루빈(현 세계체스복싱기구 회장)의 주도로 최초의체스복싱 대회가 2003년 11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벌어졌다.
이런 궁금증이 생길지도 모른다. 체스복싱에선 체스를 잘 하는 사람이 유리할까, 아니면 복싱을 잘 하는 사람이 유리할까. WCBO(세계체스복싱기구)에 따르면, 등록된 선수의 40％는 체스 선수 출신, 60％는 복싱 선수 출신이라고 한다. 그러나 어느 종목 출신이 더 유리하다는 통계 결과는 나와 있지 않다.
체스복싱의 매력은 무엇보다 육체와 정신의 조화에 있다. 선수들은 강인한 체력을 연마해야 할 뿐만 아니라 빠른 판단력, 높은 사고력을 필요로 한다.
체스복싱 대회에 참가하고 싶다면 WCBO가 정한 다음과 같은 까다로운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나이는 35세 이하여야 하며 최소 20경기 이상의 복싱 경기 경력이 필요하다. 또 ELO(체스 랭킹 산정 방식) 등급이 1800보다 낮아선 안된다. 만약 ELO가 없을 경우 WCBO의 트레이너가 온라인을 통해 당신의 체스 실력을 평가해 준다. 체스복싱 선수들은 실전과 같은 훈련을 반복하며 챔피언의 꿈을 키운다. 가령, 3분 동안 샌드백을 두드리다가 4분간 체스 게임을 한다든가 육상 트랙을 돌면서 중간중간 체스 훈련을 반복하는 방식이다.
체스복싱의 실질적 창시자인 루빈 회장은 체스와 복싱의 결합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맨 처음 체스복싱을 소개했을 때 사람들은 체스와 복싱이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고 비꼬더군요. 하지만 제 생각은 좀 달랐습니다. 사람들은 사물을 구분 짓길 좋아합니다만, 제가 보는 세상은 모든 게 긴밀하게 연관돼 있어요. 복싱과 체스는 인간의 호전성을 조절하는 스포츠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과연 마이크 타이슨과 같은 전직 헤비급 챔피언이 체스복싱에 도전하면 곧바로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아까 말했듯이 WCBO는 ELO 등급 1800 이하의 선수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타이슨이 체스복싱 챔피언의 자리가 탐난 다면, 먼저 끈기 있게 수년 간의 체스 수련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버텨낼 진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