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벌을 뛰어넘다.
김 감독은 축구계가 학력이 필요한 부분과 기술이 필요한 부분을 가르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하곤 했다. 기술을 요하는 사람을 선발할 때는 학력보다 기술의 숙련도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한사람을 잘못 뽑았을 뿐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만, 결국 조직 전체의 흐름을 망치고 게임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
그는 고졸이다. 연세대, 고려대 등 명문대 출신만이 국가대표로 출세한다고 알려졌던 시절, 젊은 김호는 국가대표 수비수로 9년을 활약했다. 그리고 국가대표 감독이 되어 ‘94년 미국월드컵을 이끌었다. 프로팀에서는 울산 현대와 수원 삼성을 이끌면서 2번의 K리그 우승과 7번의 컵 대회 우승, 그리고 2번의 아시아컵 대회 우승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그는 ‘축구계의 야인’(野人)으로 불린다.
그가 국가대표 감독 자리에 7년 후배인 이회택 감독 후에야 맡을 수 있었던 것도 학벌이 작용했다. 매번 감독 물망에 올랐지만 축구계의 표심이 학벌을 중심으로 갈리는 바람에 결국 ‘94년에야 맡았다.
하지만 그의 월드컵대표팀 운영방식은 독특했다. 학연을 이용해 월드컵 대표에 넣어달라는 선수는 모두 배제시켰다. 부탁한 사람은 한 명일지 모르지만 그 한 명이 전체의 흐름을 방해하기 때문이었다. 연·고대가 주류였지만 고려대에 다니던 홍명보와 건국대에 다니던 황선홍을 함께 발탁해 미국월드컵에 데려갔고 실력에 따라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슬럼프에 빠져있던 고졸출신 고종수를 다시 최고의 선수로 만들어 가고 있다.
그가 말하는 축구팀은 유기체다. 한 부분이 학벌에 의해 점령되면 다른 분야도 전염된다. 혼자만 부정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온 물을 흐릴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팀의 조직력을 깨 놓는다. 그래서 김 감독은 “열한마리의 사자로 이루어진 팀보다 한 마리의 사자와 열 마리의 이리로 이루어진 팀이 강하다.”라고 말한다.

역경에 대한 응전이 삶이다.
초등학교 시절 육상을 했던 김 감독은 5학년 때 축구로 전향했다. 그는 당시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이 자유중국에게 3대2로 지던 순간 축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집안형편이 어려워지면서 19살에 큰 위기를 겪게 된다.
‘64년 청소년 대표 선발전에서 그는 낙방했다. 주위에서는 최고의 기술을 구사한다고 찬사를 보냈지만 그에게는 배경이 없었다. 실력이 통하지 않는 축구계에 대한 좌절은 더욱 컸다. 집을 나와 방황을 하면서 축구를 포기했다. 자살까지 생각했다. 빵 하나로 하루의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그런 그를 구제한 것은 친구들이었다. 밥을 먹여주고 하숙집에서 돌아가며 잠도 재워주었다. 친구들은 그의 기술을 믿어주었다. 실의에 빠져 있는 그에게 친구들은 “낙마를 두려워하지 마라. 언젠가 네가 이긴다.”라는 말을 해 주었다.
그는 지식보다는 지혜로운 축구선수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블랙박스가 아닌 화이트박스를 지니기로 한 것이다. 그가 설명하는 블랙박스는 컴퓨터처럼 기록되어 있는 지식이다. 언제나 꺼낼 수 있지만 언제나 컴퓨터의 힘을 빌려야 한다. 하지만 화이트박스는 내 몸 안에 체득되어 있는 지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발현되고 어느 순간 몸 안에 내재된다. 그는 이것이 진짜 실력이라고 믿는다.
‘73년에는 국가대표를 그만두고 상업은행에 취직하려고도 했다. 편하게 돈을 벌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감독직을 위해 다시 일어났다. 쉬는 것은 자신을 먹여 살린 축구에 대한 배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 감독은 “나와의 싸움을 하지 않으면 내가 곧 적이 된다.”면서 “나를 이겼을 때 비로소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준비만이 최고의 슛을 만든다.
김 감독은 준비성을 자신의 원동력이라고 믿었다. 국가대표 감독 자리가 자신에게 올지 안 올지 모르지만 5년 이상을 대표 팀에 대해 남모르게 분석하고 구상했다. 그리고 결국 제안이 왔을 때 기술에 있어서는 더 이상의 준비된 자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준비를 조금이라도 게을리 하면 학벌이라는 변수에 쉽게 말려든다고 생각했다.”면서 “준비된 자만이 원하는 것을 차지할 수 있다.”라고 밝혔다.
그에게 축구는 단순히 이겨야 하는 게임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얼마나 즐기는가 하는 것이다. 김 감독은 100년을 넘긴 유럽의 팀들을 예로 들었다. 김 감독은 “축구를 잘해야 하는 이유는 팬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이고 팬이 많아지면 축구의 질은 높아진다.”라면서 “이런 선순환을 위해 축구를 게임이 아니라 축제로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가 시민구단인 대전 시티즌의 감독을 맡은 이유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감독직을 물러나게 되면 축구발전을 위한 카운슬러가 되려 한다. 김 감독은 “유소년축구에도 기술고문이 있어야 하고 우리는 기술자다.”라고 말했다. 그는 주 5일제가 정착돼가는 한국에서 축구가 어린이들에게 꿈을 주는 문화를 선도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을 위해 현재의 학원스포츠를 지양하고 클럽스포츠문화를 키워야 한다고 지적했다. 학원스포츠는 운동을 하는 아이들에게는 축구의 즐거움을 잃게 하고, 나머지 대부분의 아이들에게는 참여하는 즐거움을 빼앗기 때문이다.
김 감독은 자신의 200승은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이 만든 기록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축구계는 그 사랑에 대한 보답을 위해 언제나 준비하는 자세를 버려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