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웹진 2008년 9/10월호

추수가 지난 늦가을 들녘은 늘 허전하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이 일으키는 정서일 뿐이다. 정작 허전하고 쓸쓸한 것은, 가을이 되어도 곳간을 채우지 못한 가난한 농부들 가슴속일 것이다. 땀 흘려 가꾸고 거둬들인 곡식을 자재 값, 비료 값, 품삯으로 처분하고 빈손으로 돌아서게 되었을 때 밀려오는 스산함인 것이다. 더욱이 몇 푼 안 되는 직불보조금마저 잘 사는 도시인과 관료들에게 강탈당한 배신감으로, 이번 늦가을은 그 서늘함이 뼛속까지 스며들었을 터다.
그런데 올가을에는 농민의 가슴을 훑고 지나간 그 서늘함이 대도시 서민의 가슴속까지 파고들었다. 기름 값을 필두로 거의 모든 물가가 줄줄이 치솟는데, 소득은 제자리 지키기도 어렵고, 장사도 안 되고, 밥상마저 불안하니 말이다. 참으로 암담한 것은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위기의 먹구름이 전 세계를 뒤덮고 있다는 것이다. 총체적으로 살얼음판이다. 특히 쌈짓돈이 모자라 빚까지 내어 ‘재테크’에 투자한 이들은 낙엽처럼 떨어지는 주가시세를 두려운 눈으로 지켜보며, 다가오는 겨울 앞에서 떨고 있을 것이다.
지난 십여 년간 우리는 ‘재테크’니, ‘주식’이니, ‘펀드’니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밥집에서든 술집에서든 ‘개미(소액 투자자)’들의 수다가 이어졌다. 재테크를 모르면 대화에 끼어들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실제로 ‘재미’를 본 ‘개미’도 가끔 나왔다. 게다가 금융기관에서는, 더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달콤한 말로 저축이 아닌 ‘투자’를 권했다. 평생 벌어도 집 한 채 갖기 힘든 서민들도 거기에 귀가 솔깃하여 지갑을 열었다.
그렇게 개미들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재테크’라는 말이 불로소득을 정당화하는, 뻔뻔한 신조어임을 지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 결과 수많은 ‘개미’들은 자고 일어나면 원금 일부가 증발해 버리는 해괴한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의아해 할 일은 아니다. 단지 임자가 바뀌었을 뿐, 돈이 증발할 일은 없으니 말이다. 돈이라는 것은 돌고 도는 것이므로, 잃는 이가 있으면 반드시 얻는 이가 있다. 그래서 밥벌이하는 고단함을 털어놓을 적마다 어른들이 말씀하시지 않던가. ‘남의 돈 먹기가 그렇게 쉬운 줄 알았느냐’고.
그 말씀은 세상 돈에 다 임자가 있으니 ‘내 돈’ 아니면 다 ‘남의 돈’이라는 뜻도 담고 있다. 누군가 마구 돈을 찍어서 공짜로 나눠 주지 않는 이상, 아무나 주워 담을 눈먼 돈은 어디에도 없다. 불로소득으로 내가 단맛을 누릴 때, 어떤 이웃은 그만큼 쓴맛을 느낀다는 말이다. 바로 ‘제로섬’ 원리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잊고 지낸다. ‘수익’에 대한 욕망이 분별력을 흐려 놓은 결과다.
지금 우리는 개인의 욕망과 이기심이 극대화된 세상에 살고 있다. 더 많은 권리와 풍요를 얻기 위해서 사람들은 끝없는 돈벌이 경쟁을 벌인다. 마치 거세게 흐르는 물살 위에 뗏목을 타고 떠 있는 신세다. 산란기의 연어 떼가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오르듯, 끝없이 노를 저으며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떠밀려 내려갈 처지인 것이다. 멈춤은 곧 퇴보다. 그래서 모두들 자신을 다그치고 서로를 몰아붙이며 비장하게 외친다. 돈을 향하여, 성공을 향하여, 쉬지 말고 노를 저어라 노를!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제 풍요의 시대는 갔다. 장기 불황의 그늘은 짙어만 간다. 단순한 불황이 아니다. 경제공황이다. 금융 위기가 아니라 자본주의 구조 자체의 위기이며 한계다. 1990년대 초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이 망한 이래 20년도 지나지 않아서 자본주의 중심국 미국의 금융시장이 무너져 버렸다. 거품을 잔뜩 풀어놓고 돈놀이에 한껏 취한 결과다. 게다가 더욱 끔찍한 것은, 우리 경제 체제 또한 미국의 그것과 닮았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지구 전체가 에너지와 식량 위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을 친들, 다시 풍요의 시대는 오지 않을 것이다. 다들 쉬쉬하며 애써 희망을 찾으려 하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아마도 당분간은 많은 고통이 따를 것이다. 금융 위기로 인하여 기업 활동이 위축되고, 비정규직과 실직자가 늘어나며 소득은 줄어들 게 뻔하다. 치킨점이든 미용실이든 생계형 자영업도 잘될 리가 만무하다. 대다수 서민의 삶은 당연히 바닥을 헤매게 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지금 어둡고 긴 터널 안으로 들어서고 있다. 그래서 두렵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앞에 놓인 것은 절망뿐일까.
하지만 담담하게 걸어가자. 언젠가 터널의 끝이 보일 것이다. 지금의 위기는 부족해서 생긴 위기가 아니다. 필요한 것보다 훨씬 많은 재화를 경쟁적으로 생산하여 남발한 결과다. 이른바 과잉생산과 과잉투자가 지금의 위기를 몰고 왔다는 것이 권위 있는 학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의 욕망을 지금보다 줄여야 한다. 부자가 되는 욕망, 권력에 대한 욕망을 조절해야 한다. 무한경쟁을 접고, 승자와 패자가 서로 악수를 나누며 어울려 살 수 있어야 한다.
어둠의 터널 너머에 있는 세상은 지금과는 다른 세상일 것이다. 풍요로움보다는 소박함이 미덕이고, 많이 가진 것보다는 많이 나누는 것이 더 행복한 나라다. 빠름보다는 느림을 추구하고, 조작된 편리함보다는 자연스러운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는 나라다.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불로소득에 의한 자본축적의 환상과, 풍요로운 소비의 욕망을 던져 버려야 한다. 어쩌면 지금 너무나도 당연하게 누리고 있던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사실 우리가 평생을 달고 살아온 관념과 소비 습성을 한순간에 벗어던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숲을 이루고 서 있는 나무를 보라. 한여름 내내 물오른 잎을 무성하게 달고 있던 나무도 가을이 되면 잎을 버린다. 그리고 앙상한 몰골로 찬 겨울을 맞이한다. 겨우내 그렇게 내면을 단단히 여물게 하여 새봄을 준비하려는 까닭이다. 그렇듯 우리도 긴 겨울 앞에서 내면을 결박하고 있던 욕망을 하나씩 버려야 한다. ‘버림의 미학’을 삶의 새로운 양식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지난날의 탐욕적 풍요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