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후반에 어의(御醫)였던 백광현(白光炫)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천한 집안 출신이었지만 실력으로 어의가 된 사람이다. 18세기 정래교(鄭來僑)라는 중인 출신 문인이 있었다. 타고난 재주에도 불구하고 신분 때문에 어찌할 수 없었던 그는 자아실현을 위해 글을 쓰는 길을 택했다. 당대의 이름난 시인이었던 그가 쓴 백광현의 전기 전반부를 소개하면 이렇다.

어의 백광현은 한미한 집안 출신이다. 인조 대에 태어났다. 사람됨이 순하고 공손했다. 마을에서 진실하게 처신해 마치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였다. 키가 크고 수염을 보기 좋게 길렀으며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집이 본래 가난해서 항상 굵은 베로 만든 철릭(철릭은 ‘무관이 입던 옷’을 말하지만 그가 무관이었다는 뜻이 아니라 입을 옷이 없어 좋지 않은 그 옷만 늘 걸치고 다녔다는 뜻이다.)을 입고 머리에는 파립(찢어져 못 쓰게 된 갓)을 쓰고 어슬렁어슬렁 시장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남의 뒤를 따라 구걸을 하니 사람들이 대부분 싫어했다. 소년들이 간혹 밀치고 발로 차며 놀려도 광현은 웃을 뿐 화를 내지 않았다.
처음에 광현은 말을 잘 치료했다. 오로지 침만 썼는데 책을 보고 한 것이 아니었다. 그 기술이 손에 익숙해져서 사람의 종기에도 써 봤더니 종종 기이한 효험이 있었다. 드디어 사람을 치료하는 데 전념해서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종기를 많이 고쳤다. 앎은 더욱 정밀해지고 침은 더욱 잘 놓게 되었다. 당시 의술로는 악성 종기나 독이 뿌리를 내린 등창은 치료할 수 없었다. 그러나 광현은 큰 침으로 종기를 찢어 독의 뿌리를 뽑았다. 그야말로 죽어가던 사람도 살려냈던 것이다.
처음에는 침이 지나치게 강해서 사람이 죽기도 하였다. 하지만 효험을 보고 살아난 사람이 더 많았으므로 병자들이 날로 많이 모여들었다. 광현은 침술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점점 명성을 떨쳐 신의(神醫)라고 불리게 되었다. 숙종 초에 어의로 선발되었다. 공로가 있을 때마다 품계가 올라가 종1품에 이르렀고, 여러 직책을 거쳐 고을 현감이 되었다. 그가 살던 마을에서는 그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그는 지위가 높아진 뒤에도 병자가 있다면 귀하거나 천하거나, 멀거나 가깝거나 상관하지 않고 찾아갔고 가서는 증세가 좋아지는 것을 볼 때까지 최선을 다했다. 나이 들고 귀해진 뒤에도 해이해지지 않았다. 의술에 끌린 것이 아니라 대개 천성이 그러했던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조선시대에 의원은 중인 이하의 신분이었다.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일은 마음을 고치는 것만큼이나 소중한 일이지만 그것도 기술로 보아 높이 치지 않았다. 더구나 백광현은 대대로 의원 집안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었다. 철릭을 입었고, 처음에는 말을 치료했다는 것으로 보아 무인 집안 출신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거지 노릇, 바보 노릇을 할 정도로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다.
정래교가 이런 인물에 주목한 것은 그가 실력으로 어의가 된 데 있었겠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백광현이 처음에 어떻게 침술을 익혔는지에 대해서는 정보가 없다. 분명 스승이 있었겠지만 정래교는 거기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백광현의 발전 과정이다. 처음에 말을 침으로 치료하다가 사람을 치료하고, 침술이 점점 정밀해져서 죽어가는 사람도 살려 신의로 불리게 되고, 마침내 어의가 된 과정, 거기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숙종 10년(1684) 5월 2일의 실록을 보면 어의에 임명될 될 때 ‘글자는 모르는 천한 인물’이라는 점을 들어 시비를 거는 신하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의가 되고, 고을 현감까지 된 백광현에게 정래교는 자신을 투사하고 싶었을 것이다. 뛰어난 시인으로 인정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벼슬에 나갈 수 없었던 자신의 처지를.
그러나 정래교가 더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은 백광현이 지위가 높아진 뒤에도 환자의 귀천도 원근도 상관하지 않고 병이 나을 때까지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이었다. 사람은 대개 ‘개구리 올챙이 시절을 모른다’는 속담처럼 옛일을 잊게 마련이다. 특히 신분이 달라진 다음에는 더하다. 그런데 백광현은 그렇지가 않았다. 백광현은 17세기 조선사회의 다수자의 처지가 된 이후에도 소수자였던 시절의 마음을 잊지 않았다. 정래교는 물론 이를 천성으로 돌리고 있는데 이는 당시 새롭게 제기되고 있었던 천기론(天機論), 다시 말해 사람의 가치는 타고난 신분이 아니라 타고난 자질(천성)로 결정된다는 사상에 따라 그렇게 평가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평가에는 신분은 낮았지만 타고난 자질에는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던 작자 정래교의 마음이 투사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백광현의 모습에는 천성 이상의 것이 있는 듯하다. 위에서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이어지는 일화에 따르면 나이가 들어 백광현은 병자를 보면 한 눈에 죽을 지 살 지를 꿰뚫어 보았다고 한다. ‘절차탁마대기만성(切磋琢磨大器晩成)’이란 말이 있듯이 백광현은 사람을 죽이는 의료사고에도 불구하고 부단히 침술을 연마하여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던 것이다. 신의라는 평가는 이 깨달음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찬사였을 것이다. 백광현의 부단한 연마는 자신이 소수자라는 인식, 소수자의 처지를 견지하겠다는 자각이 없었다면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타고난 자질을 앞세웠다면 신분이 높아진 이후에 낮은 자리에 머물러 있었을 리가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