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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마음의 풍경

할머니 오시던 날(권선미) 나는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 서울로 이사를 왔다. 그때까지 할머니를 비롯해 삼촌, 고모들과 시골서만 살았다. 갓 상경한 부모님은 작은 고추방앗간을 시작하셨는데, 장사가 잘되어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쉴 틈 없이 바쁘셨다. 그 시절 나에게 가장 반가운 손님은, 몇 달 만에 한 번 씩 오시던 할머니였다. 언제 올라가겠노라 전화를 받고 그날이 되면, 아침부터 신이 났다. 학교 마치고 여느 때 같았으면 아이들과 노느라 바빴을 텐데 친구들을 버려둔 채 집으로 부리나케 달렸다. “할머니~!” 하고 달려가 할머니 품에 안긴 내가 제일 먼저 물어보았던 건 늘 ‘몇 밤 주무시고 가실 것인지’였다. 길 건너 이웃에는 큰아버지가 살고 계셨는데 나와 동갑인 사촌과 서로 할머니는 우리 집에서 주무셔야한다며 티격태격했다. 당시는 지금처럼 택배를 쉽게 이용하기 힘들었다. 할머니는 모든 짐을 바리바리 손에 들고 이고 오셨더랬다. 할머니의 짐은 늘 푸짐하다 못해 너무 많았다. 각종 나물, 잡곡, 참기름, 밤, 홍시 등등. 시골에서 장만한 온갖 것들이 다 나왔다. 하나하나 짐을 풀다보면 언제나 우리 손주들을 위해 준비해온 빛깔 고운 사탕이며 약과 같은 주전부리들이 있었다. “요거 없으면 좀 섭섭하재?” 할머니는 웃음 띤 얼굴로 나와 동생들의 손에 맛난 것들을 쥐어주셨다. 할머니가 장에서 직접 산 것도 있었고, 선물 받으신 것을 안드시고 챙겨 오기도 하셨다. 할머니가 오셨다 가시고 나면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었다. 부모님은 고단한 일과가 끝나도 제대로 쉴 틈이 없으셨다. 그래서 당연히 내 이야기를 찬찬히 들어주실 여유는 없으셨다. 그러나 할머니가 계셨던 며칠 간은 나는 ‘왕수다쟁이’가 되었다. 학교생활, 선생님과 친구들 이야기, 소풍, 운동회 등을 미주알 고주알... 내 말들에 할머니는 늘 고개를 크게 끄덕이시며, “아이고 그랬디나?”, “내 새끼 서울 와서 고생이 많구먼.”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린 마음에도 내 사소한 이야기 하나까지 세심하게 들어주시는 할머니가 큰 위안이고 기쁨이었던 것 같다. 지금 할머니는 시골에 혼자 계신다. 팔순이 넘은 연세에 기운은 떨어지셨어도 여전히 밭에 깨도 심고 고구마도 캐신다. 전화를 드리면 늘 하시는 말씀이 ‘개미새끼 한마리 보이질 않는다’며 시골이 예전보다 많이 적적해지셨다고 하신다. 이번 겨울에는 할머니께 다녀 올 생각이다. 할머니가 너무나 사랑하는 7살 난 나의 아들과 함께. 청소며 빨래며 다 해드리고 맛난 것도 챙겨드릴 생각에 벌써 마음이 설렌다.

학사모를 쓴 할아버지(유재욱) 몇 해 전 직장을 다니던 중 한 대학의 평생 교육원에서 관련 업무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낮에는 직장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공부를 해야 하는 주경야독은 말처럼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의욕적으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강의 내용도 머릿속에 들어오는 둥 마는 둥, 점점 나태해져가는 내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이 시간과 노력이 아무 소득이 없는 게 아닐까? 고민하며 의미 없는 시간들을 흘려보내던 어느 날. 강의실 맨 앞자리에 앉아 열정적으로 강의를 듣던 어느 백발 노인을 발견했다. 한 눈에 보아도 몸이 편치 않으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PC의 모니터 화면 쪽으로 상당히 가까이 다가가신다거나, 강의 중 질문을 자주 하는 것으로 보아 눈도 어두우시고 귀도 잘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 그러나 내 눈에 들어온 그 분의 열정만큼은 여느 젊은이 못지 않아보였다. 제일 일찍 강의실에 도착하셔서는 맨 앞자리에 앉아 수업 준비를 하셨고, 결석도 거의 안하시는 걸로 유명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강의가 끝난 후에는 자식뻘 되는 강사에게 열심히 물어보기도 하고, 수강생들과 커피 한 잔 나누며 담소도 자주 나누는 등 그 분의 모습이 나에게는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학업에 대한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나에게 그 할아버지의 열정적인 모습은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그때 그 모습이 마중물이 되었는지, 그 후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학업에 열중하여 직장 생활에서의 전환점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삶이 힘들고, 회의를 느낄 때마다 나는 할아버지와 같이 학사모를 쓰고 찍은 수료식 사진을 보곤 한다. 학사모를 쓰고 환하게 웃고 있는 할아버지가 나에게 “여보게, 부끄러운 건 나이가 아니라 의지 부족이 아니겠는가?” 라고 말씀해주고 계신 것만 같다.

아버님의 전동휠체어(신승남) 십여 년 전 상처하신 아버님은 자식들에게 기대며 살지 않겠다며 홀로 살고 계신다. 때문에 우리 4남매의 마음 속에는 늘 안타까움과 죄스러움이 있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형수와 아내가 순번을 정해 아버님의 식사와 빨래를 챙겨드렸지만 그것도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멀리서 찾아오는 며느리, 자식들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으셨는지 혼자도 할 수 있다며 손사래를 치셨다. 궁여지책으로 인근에 사시는 가사도우미를 시간제로 고용하여 우리 자식들은 어느 정도 다리를 뻗고 잘 수 있었다. 그런 아버님이 2~3년 전부터 무릎 관절이 안 좋아져 지팡이에 의존해야 할 정도가 되셨다. 얼마 전 아버님은 자식들이 모인 자리에서 전동 휠체어 카다로그 한 장을 불쑥 꺼내시며 한 번 훑어보라 하셨다. 그런 아버님의 모습에는 기계의 도움을 받고서라도 당신이 가고 싶어했던 곳을 꼭 가야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형제들은 전동 휠체어의 위험성을 열변하며 아버님을 열심히 설득했지만, 결국 아버님은 평소 자식들에게 받은 용돈을 차곡차곡 모아 전동휠체어를 손수 구입을 하셨다. 그리고는 판매 직원에게 조작법을 완벽하게 배웠다며 되레 자식들의 우려를 잠재우려 노력하셨다. 전동휠체어 시승식이 있던 날, 아버님의 얼굴은 다소 상기되어 보였다. 전동휠체어를 능숙하게 운전하시는 아버님의 모습을 직접 본 우리들은 안심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준법 정신이 투철하신 아버님은 차도가 아닌 인도로만 다니셨고, 전후좌우를 유심히 살펴보면서 안전 운행을 하셨다. 그런아버님의 모습이 자랑스러워 보일 정도였다. 오늘도 아버님의 만수무강, 그리고 전동 휠체어의 무사고 운전을 두 손 모아 간절히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