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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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을 말한다

제3회 8만 시간 디자인 공모전 수상작 "뷰티~풀 마인드 뷰티~풀 라이프"(글 : 공옥희 / 최우수상) 8만 시간이란? - 60세 은퇴자가 80세까지 건강하게 생존할 경우의 여유 시간. 은퇴 후 하루 중 일상에서 꼭 필요한 시간을 제외하고 남는 여가시간은 하루 11시간 정도이며, 60세에 정년 퇴직해서 80세까지 20년 동안의 여유시간은 80,300시간(11시간*365일*20년)이 된다. “이거 올려줘. 빨리 빨리.”

오늘 아침도 어김없이 아침을 먹으려는 딸아이에게 SOS 신호를 보낸다. 지퍼가 올라간 것을 확인하자 마자 준비물을 점검한다. 가장 중요한 이야기 원고를 머릿속에서 가볍게 정리하고 책가방에 넣는다. 딸에게 선물로 받았던 목걸이 카드지갑과 큼직한 스마트폰도 잘 챙긴다. 한복 치마에는 주머니가 없어서 가방이 꼭 필요하다는 걸 다시 한 번 느끼는 순간이다. 어린 시절 등교시간에 늦을까봐 최단시간에 집을 나섰던 모습이 겹쳐진다. 다만, 그 때 그 시절 나와는 확실히 달랐다. 지금은 이 순간이 너무 소중하고 즐겁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누구나 화려한 과거 하나쯤은 가지고 있듯이, 나 역시 왕년에는 백의의 천사였다. 집안 형편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들어간 국군 간호 사관을 졸업하는 순간 간호 장교의 길이 내 평생의 소명이자 사명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되면서 대위 시절 전역을 하고, 병원에서 간호사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첫째 아이를 갖게 되면서 직장 생활을 그만두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전업 주부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리고 25년이 넘는 시간 동안, 누구의 남편, 혹은 누구의 엄마로 살아왔다.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일하는 여성을 사회가 받아들이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게다가 남편은 한국 특유의 가부장 유전자를 그대로 지닌 전형적인 대한민국 남성이었다. 따라서 당시에 일과 가정을 병행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남편의 반강제적 권유에 설득 당했고, 자연스럽게 일상의 하루하루에 젖어 들어갔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서서히 은퇴 당하였다.

‘이야기 할머니를 모집합니다.’라는 포스터의 문구를 발견한 것은 서류를 발급받기 위하여 관공서에 방문한 날이었다. 포스터 속에 한복을 입고 어린 아이들에게 재밌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한 할머니의 모습이 그 날 저녁 내내 머리에서 떠나가질 않았다. 저녁식사 시간에 남편과 아이들에게 선언하고, 지원서류를 준비하며 면접까지 힘차게 나아갔다.

“선생님, 합격하셨습니다”라는 전화를 받는 순간, 찔끔 눈물이 났다. 딸아이는 신입 사원이 된 걸 축하한다고 축하파티를 열어 주었다. 실상은 아르바이트나 다를 바 없지만, 서류전형부터 면접에 교육연수까지 정말 이야기 할머니 신입사원이 된 기분이었다

이야기할머니들은 전국에서 선발되어 각 지역 유치원으로 교육을 나간다. 교육 내용은 우리 옛날이야기. 즉 우리 전래 동화를 아이들이 오래오래 기억할 수 있도록 재밌고 쉽게 전달하는 것이다. 한 때 말 좀 한다는 소리를 주위에서 들었던 지라 솔직히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랜 기간 가정의 울타리 안에만 있으면서 온실 속의 화초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고나 할까.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과 배움의 시간 그리고 내가 가진 것들을 전해줄 수 있는 기회들은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호랑이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자, 나무꾼은 얼른 도망치기 시작했어요.” 앞줄에 한 여자 아이가 갑자기 놀라 움츠리는 게 보였다. 다른 남자 아이는 손을 들고 질문한다. 호기심 가득 찬 눈동자들이 나를 오늘도 긴장케 한다. 아이들은 내가 준비한 단어 하나, 몸짓 하나까지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입에서는 수없이 반복된 이야기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 아이들에게는 그것이 처음일 수도 마지막일 수도 있다.

온몸에 힘을 실어 교훈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빵빵 터지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너무 유명한 이야기라 다 알거라고 생각하고 가볍게 전달하였더니 의외의 대목에서 놀라고 감동하는 아이들도 있다. 그것은 하나의 기적이고 또 다른 세계의 탄생이다. 이야기를 시작한 순간부터는 국민연금을 말하다 나의 시간과 아이들의 시간, 그리고 나의 감각과 아이들의 감각이 만나는 시간인 것이다.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하기 위하여 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순간을 더욱 즐겁게 만들기 위하여 하모니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제 나에게는 아이들앞에서 이야기와 연주를 함께 선보여 즐거움을 줄 의무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더 큰 꿈을 꾸기 시작하였다. 과거 간호사 시절 조산사업무의 경험을 살려, 예비 엄마와 초보 엄마를 위한 이야기 놀이 학교를 운영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부터 행복보다는 행운을 기대하고 기다렸던 것 같다. 20대 시절에는 30대를, 30대 시절에는 40대를, 40대 시절에는 50대를 막연하게 그려왔듯이 과거의 나는 60대가 된 내 모습을 상상할 수도 없었고, 상상하려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지금 나에게는 나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있고, 함께 운동하는 동호회 사람들을 비롯하여 여러 친구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내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있는 이곳이 현실이고 그 현실 속에서 조금만 손을 뻗으면 변화시킬 수 있고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것들이 무궁무진하다는 가능성을 확실하게 알았으니까.

그리고 그 삶의 자세로 내일도 우리 유치원 아이들에게 신나고 즐겁게 이야기해줄 거니까. 그래서 난 삶이 즐겁고 인생이 행복하다. ‘후회? 후회할 시간조차 아까워, 얘들아. 엄마는 우리 가족을 사랑한단다.’

★제3회 8만 시간 디자인 공모전 보건복지부·국민연금공단 공동 추진 (2013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