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연금은 할아버지께서 살아계실 때 한 달에 한 번씩 십 이만 오천원씩 통장에 들어왔었다. 그 날은 나에게 할아버지께서 용돈을 주시는 날이기 때문에 잘 기억하고 있다. 짠돌이 구두쇠 할아버지의 지갑이 열리는 날인데 내가 어떻게 기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할아버지께서 말도 없이 할머니 연금을 들어 놓으셨던 거다. 평생 천원짜리 한 장도 벌벌 떠시며 잘 쓰지 못하시는 할아버지께서 할머니 연금을 매달 넣으시며 아무 말씀도 안하셨던 것이다. “여보세요. 여기는 국민연금공단 구리남양주지사입니다. 이선화 할머니 집맞죠?” 상냥한 누나의 목소리에 나는 할머니를 바꾸어 드렸고, 할머니는 전화 통화를 하시며 연극배우처럼 온갖 표정을 지으시며 이야기를 하셨다. 그리고 꺼이꺼이 우시며 할아버지께서 연금을 들어 놓았다고 말씀하셨다. “돈 벌이도 시원찮은 양반이 무슨 돈으로 그리 큰돈을 나라에 맡겨 놓았을고.” 사실 나는 알고 있다. 할아버지께서 길가에 버려진 깡통이며 빈 상자 그리고 병들을 모으고 다니셨다는 것을. 학교를 마치고 친구들과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광연아, 너희 할아버지 아니니?” 친구 태균이의 손가락이 향한 곳은 가게가 줄지어 있는 곳이었다. 전봇대옆 쓰레기장에 엎드려 무엇인가를 열심히 찾고 계신 분은 분명히 우리 할아버지가 맞았다. 작년에 엄마가 사주신 파란색 조끼와 그리고 햇빛에 반짝이는 할아버지의 대머리까지.나는 순간 얼굴이 빨간색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변했다. “아니야.” 순간 고개를 돌리며 “태균아, 내가 이번에 새로 나온 팽이 사 줄게. 가자.” 태균이의 손을 잡아당기며 할아버지께서 계신 그 곳과 반대 방향으로 잽싸게 달리기 시작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태균이는 그렇게 나의 손에 이끌려 문방구로 갔다. 한 달 용돈 오천 원을 쓰면서까지 나는 할아버지를 모른 체 하고 말았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매일 그렇게 재활용품을 주우시며 한 푼 두 푼 모아 할머니의 연금을 들어 주셨던 것이다. 그런 것도 모르고 나는 할아버지께서 거지처럼 쓰레기를 뒤지신다고 부끄럽게만 생각했다. 할머니를 위한 사랑의 행동을 나는 오해하고 말았던 것이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보며 진짜 살아계시는 것처럼 얼굴을 쓰다듬어 주셨다. “미리 말해주지 않으셨어요? 그러면 내가 고맙다는 말이라고 했을 텐데.” “어쩜 사람이 그리 무심하우. 당신 마음 알았다면 고기반찬이라도 한 번 더 해줬을 것을.” 할머니께서는 할아버지께 제대로 못해드려 아쉬운 마음들을 사진 앞에 털어놓으셨다. “아버님이 어머님 고기반찬 맛있게 드시라고 드리는 선물인 것 같아요. 어쩜시기도 딱 맞게 떨어졌네요.” 엄마는 아빠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씀을 하셨다. 사실 며칠 전부터 할머니의 이가 좋지 않아 음식 드시기도 힘들어 하셨다. 우리 형편이 그리좋지 않아 엄마 아빠는 할머니의 틀니 이야기를 하며 한숨을 쉬셨다. 그런엄마의 마음을 읽으셨는지,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나 살아생전 이렇게 크고 좋은 선물을 당신께 받기는 처음이구려. 처음 데이트 하던 날, 동산에서 꺾었다며 내민 진달래 몇 송이가 전부였는데. ”
할아버지의 로맨틱 꽃 선물에 엄마 아빠는 아버지에게 그런 낭만이 있었냐며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셨다. 할머니의 틀니 때문에 걱정이셨는데 그것을 할아버지께서 해결해 주셔서 감사한 마음에 그렇게 기뻐하신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이제 할머니께서는 할아버지께서 선물해 주신 틀니 덕분에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드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할아버지께서 선물한 국민연금은 나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었다. 유비무환! 미리 준비하면 걱정할 것이 없다는 말이 국민연금이라는 국가 정책에 그대로 반영된 듯하다. “나는 아직 학생이라서 아무것도 해 줄 것이 없지만, 어른이 되면 엄마 아빠를 위해 꼭 국민연금을 준비할 것이다. 그래서 할아버지처럼 깜짝 선물로 엄마 아빠의 눈물을 한 바가지 받아 낼 것이다. 그 때쯤 엄마 아빠에게 국민연금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할머니의 틀니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