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도의 고장, 경주

가벼운 마음으로 찾은 경주에서 발걸음이 묶이고 말았다. 시선을 던지는 곳마다, 들어선 골목마다 쉽게 지나칠 수 없는 풍경이 있기 때문이다.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천년고도의 모습은 머릿속으로 막연하게 상상해왔던 것보다 훨씬 더 웅장하고 깊이 있다. 잘 알려져 있듯 경주는 기원전 57년 신라가 건국된 이후 992년 동안 신라와 통일신라의 도읍지였다. 천년이라는 시간을 이어온 왕조는 세계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가 어려운 만큼 신라의 도읍이었던 경주가 갖고 있는 의미는 특별하다. 한 나라의 정치와 경제, 문화를 대표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수도다. 신라는 나라가 건립된 이후부터 멸망할 때까지 단 한 번도 수도를 옮기지 않았다.경주의 도시 전체에 산재해 있는 신라 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정부는 ‘경주역사유적지구’라는 이름으로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신청했고, 2000년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유네스코(UNESCO)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각 시대별, 또는 테마별로 전시관이 구성되어 있듯, 경주도 유적의 성격에 따라 모두 5개 지구로 나뉘어 있다. 불교미술의 보고인 남산지구, 천년 왕조의 궁궐터인 월성지구, 신라왕들의 휴식처인 대릉원 지구, 황룡사 지구와 산성지구로 구분된다.
신라라는 이름으로 보낸 천 년의 시간 위에 또 한 번 천 년의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왔으니 사실 경주를 단순하게 신라의 천년고도라고만 단정 지어버리기에는 아쉬움이 있다.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유산 위에 그 다음 세대들의 문화가 덧대어지면서 진화해왔기 때문이다. 멸망한 왕조의 터전 위로 사람들은 새로운 삶의 터전을 세웠고, 옛 시절의 부귀와 영화를 더듬으며 사람들은 끊임없이 몰려들고 또 흩어진다. 경주를 찾는 이들은 현재의 모습 속에서 천 년도 더 전에 존재했었던 시대의 얼굴을 그려낸다.

신라의 처음이자 마지막

남산은 경주에서도 대표적인 ‘야외 박물관’이다. 불교가 신라에 들어오기 이전부터 사람들은 남산을 성스러운 산으로 여겨왔다. 불교가 전래된 후에는 남산을 불교의 성지인 수미산으로 여기고, 많은 절과 불상, 불탑을 세우기 시작했다. 남산이 불교문화의 보고(寶庫)로 불리게 된 연유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신라의 유적으로 남산이 갖는 더 깊은 의미는 바로 이곳에서 왕조가 시작되었고 또 끝맺음 당했다는 것이다. 신라의 기원은 남산 서쪽 기슭 나지막한 언덕의 나정에서부터 비롯된다. 신라가 국가로 자리 잡기 전 이곳은 여섯 마을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마을의 촌장들이 나정에서 무릎을 꿇고 울고 있는 백마와 알을 발견했다. 그 알에서 나온 이가 바로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다.
우물은 메워졌지만 신화는 남아 전해졌다. 알에서 태어난 그는 신라의 시조가 되었고, 그가 세운 나라는 천 년 동안 한반도의 한 국가로, 또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통일국가로 이름을 남기게 된다. 나정의 남쪽으로는 포석정이 있다. 포석정은 통일신라 당시 신라 왕실의 별궁으로 이곳에서는 왕들이 신하들과 함께 연회를 즐겼다. 구불구불하게 만들어 놓은 물길 위에 술잔을 띄워 놓고 술잔이 멈추는 자리의 사람이 시를 읊고, 술을 마셨다고 한다. 중국의 명필 왕희지가 즐겼던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본떠서 만들어진 것으로 중국이나 일본에도 있었지만, 현재 그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경주 포석정뿐이다. 통일신라 말기 이곳에서 연회를 즐기던 경애왕이 후백제의 왕 견훤의 침략을 받아 최후를 맞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포석정은 풍류의 공간에서 신라 패망의 상징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삶과 죽음의 공유, 왕족의 휴식처

경주의 특징 중 하나는 도시의 한 가운데 죽은 자들의 공간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대릉원은 단순히 죽은 자를 기리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 그들이 자신들의 사후세계를 위해 준비해둔 삶의 터전이라는 점에서 매장을 위한 단순한 무덤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집들 사이 우뚝 솟아 있는 고분. 천년을 넘는 시간 동안 옛 신라의 사람들과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져 경주의 시간과 공간을 공유해왔음이 느껴진다.
아름다운 고분이 겹겹이 놓여 만들어진 능선 사이의 길은 관광객뿐만 아니라 경주 시민들이 즐겨 걷는 산책로다. 삶과 죽음의 시간이 공존하는 공간을 따라 걷다보면, 잡다한 생각들은 모두 떨쳐내고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침잠하게 된다.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가게 되는 그 경계, 고분 안과 밖, 어쩌면 불과 1m도 되지 않을 그 경계 건너 천 년의 시간이 잠들어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경건해진다. 신라하면 떠오르는 대표적 유물 중 하나인 천마도 역시 이곳 대릉원에 있는 고분 중 하나에서 발견되었다. 천마도가 발견된 고분을 천마총이라고 부르는데, 금관을 비롯해 장신구와 무기, 유리병, 그릇 등 1만여 점이 훌쩍 넘는 엄청난 양의 유물이 발견되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천마총에서 발견된 유물들의 진품은 경주국립박물관에서 보관 중이지만 이곳 천마총 전시장에서도 복제된 유물들을 감상할 수 있다.

아름다운 신라의 달밤

해가 지기 전에 월성으로 향했다. 신라 왕궁터로 알려진 월성은 모양이 꼭 반달을 닮아 반월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서쪽 계단을 따라 올라가자 넓게 펼쳐진 월성의 터가 모습을 드러낸다. 소나무를 비롯한 여러 수목들이 우거져 운치를 더 한다. 월성의 동쪽에는 신라 궁궐의 별궁 정원인 동궁과 월지가 있다. 이곳은 신라 최초의 문화공간이자, 중심지였다. 남천이 흐르는 남쪽을 제외하고 동쪽, 서쪽, 북쪽으로 인공 호수인 해자를 만들어 궁궐을 방어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기록만 남아 전해지고, 그 안쪽으로 흙과 돌을 섞어 만든 성벽 유적지만 남아 있다. 월성에 남아 있는 동궁과 월지는 지금도 그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다. ‘달이 비치는 연못’이라는 뜻으로 ‘월지(月池)’라고 불렀다고 한다. 연못 옆에 임해전이란 전각을 짓고 신라를 찾은 귀빈들을 접대하는 연회를 베풀었다. 통일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이 태조 왕건을 위해 이곳에서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아름다운 동궁과 달이 비치는 연못 월지의 야경은 경주에서도 손꼽히는 경관이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첨성대가 있다. 첨성대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이 만든 건축물이다.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농사 시기를 결정하기 위해 별을 관측했다고 한다. 하지만 첨성대가 월성과 김알지가 태어난 숲인 계림 사이의 넓은 평야에 위치하고 있는 점 등을 들어 천문 관측이 아닌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들이 제시되고 있다.
높이 약 9.5m, 호리병처럼 생긴 독특한 모양의 첨성대는 경주를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자리 잡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수학여행 필수 코스로 이곳에서는 언제나 기념사진을 찍느라 분주한 사람들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최근에는 신라 달빛의 그윽함과 현대적 조명의 화려함이 더해져 황홀한 분위기를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