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창고로 거듭난 곡식창고

죽향(竹鄕)의 고장답게 담양하면 떠오르는 건 역시 대나무다. 시원스레 하늘을 향해 뻗어 오른 대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죽녹원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코끝에 대숲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사이 연두와 녹색의 교차는 청량함과 싱그러움을 품는다. 대나무는 담양의 곳곳에 문화로 스며들었다. 대나무를 활용한 각양각색의 죽세공품은 물론, 죽순이 들어가는 비빔국수와 댓잎, 멸치, 고사리 등을 커다란 솥에 넣어 삶은 약계란 등 재미난 먹거리도 빠지지 않는다.
2015년 담양에 대나무와 콜라보된 색다른 공간이 등장했다. 바로 ‘담빛예술창고’다. 1968년 정부양곡을 보관하기 위해 지어졌던 대형 곡식창고에서 문화예술공간으로 거듭났다. 창고주의 아호를 그대로 사용해 남송(南松)이라 이름 붙였던 이곳은 국가의 수매제도가 변경되면서 그 쓸모를 잃고 10년이 넘는 시간을 비워진 채 흘려보냈다. 외관의 페인트칠은 점점 벗겨져 갔고, 곳곳에 자리 잡은 먼지와 거미줄은 건물을 점점 더 폐가의 모습으로 전락시켰다.
폐공간을 새롭게 재탄생시키기 위해 여러 방법이 논의되었다. 이곳은 관방제림(천연기념물 제366호)과 접근성이 좋아 문화재청에서 매입해 공원화하는 계획이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담양군에서 다시 이곳을 매입해 문화시설로 리모델링 하기로 했고, 그렇게 담빛예술창고가 탄생하게 되었다. 폐기되어버린 곡식창고가 지역의 문화와 예술이 가득 담긴 보물창고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관방제림을 배경 삼은 앞마당은 대나무를 활용한 예술작품으로 가득 채워졌다. 마스코트처럼 자리 잡은 판다의 모습은 귀여우면서도 익살스럽기만 하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ㄱ’자 모양의 건물, 투박하면서도 단단하게 쓰인 ‘南松倉庫’의 현판은 건물의 나이를 충분히 짐작게 한다. 곡식을 저장하던 공간은 각각 전시관, 음악과 문학을 즐길 수 있는 카페가 되었다. 리모델링의 과정에서 청문회 등을 통해 주민들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만든 공간인 만큼 문화예술을 통해 지역사회와 소통하고 함께 상생해 나가는 것을 목표로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진행되고 있다.

음악이 흐르는 시간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 시간, 담빛예술창고의 시간은 느리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게 흘러간다. 카페 내부에 3천 권 이상의 책이 비치되어 있다고 하니 작은 도서관이나 다름없다. 매년 새롭게 책을 구입해 서가를 채우고 있어, 이곳에 오면 아이부터 어른까지 취향에 따라 책을 골라 읽을 수 있다. 담빛예술창고의 매력은 또 있다.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대나무파이프오르간이다. 카페 1층에 자리 잡은 이 거대한 악기는 존재만으로 압도적인 아우라를 풍긴다. 대나무로 만들어진 오르간이라니, 그 음색이 궁금할 수밖에 없다. 이전에는 일주일에 네 번 시간을 정해 연주가 진행되었지만 지금은 코로나19로 인해 주말에만 하루에 한 번씩 연주되고 있다. 조금만 시간을 들이면 온라인에서 연주 영상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팬플룻 소리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대나무파이프오르간은 필리핀에서 왔다. 벨기에 신부가 필리핀 공장에서 기술을 배워 이곳 담빛예술창고에 제작·설치했다고 한다. 대나무의 고장에 잘 어울리는 악기이면서도 쉽게 접할 수 없는 파이프오르간의 대중화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자연이 만들어낸 하모니

담빛예술창고 뒤편으로 뻗어있는 관방제림은 약 2km에 달하는 풍치림으로 수령이 300~400년에 달하는 나무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울창한 숲과 그 옆을 유유히 흘러가는 관방천은 자연이 만들어내는 완벽한 하모니 중 하나다. 관방제림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관방제림은 조선 중기 1648년 담양부사로 부임한 성이성에 의해 처음 쌓아지기 시작했다. 그는 해마다 발생하는 홍수피해를 막기 위해 관방천에 제방을 쌓았다. 영산강의 상류인 이곳의 물길을 다스려서 천변에 사는 백성들의 피해를 줄여주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성이성이 ‘춘향전’에 나오는 이몽룡의 실제 인물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남원부사로 부임한 아버지(성안의)를 따라와 춘향을 만났다고 한다. 비록 정설이 아닌 전해지는 이야기지만 관방제림을 더욱 친근하고 낭만적으로 느끼기에는 충분하다. 성이성에 이어 1854년에 부임한 부사 황종림은 관비(官費)를 들여 제방을 더욱 탄탄하게 쌓았고, 700여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관에서 쌓은 제방, 관에서 심은 나무. 이곳이 ‘관방제(官防堤)’라고 불리는 이유다.
숲의 향이 배어든 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관방제림을 따라 걷는 시간은 번잡한 마음을 다잡기에 충분하다. 군데군데 자리 잡은 나무의자와 정자, 또 평상은 취향껏 휴식을 즐길 수 있도록 한다. 가족들은 도란도란 평상에 둘러앉기도 하고, 연인들은 자전거를 빌려 이 길을 함께 달리기도 한다. 탁트인 의자에 앉아 자신만의 배경음악을 선곡해 들으며 감성에 흠뻑 빠져보는 것도 이곳을 즐기는 하나의 낭만이다.

문화를 빚는 주조장

담양 원도심에는 한때 주조장으로, 의원으로, 읍교회로 사용되었던 세 공간이 있었다. 시대의 흐름에 뒤처져 버려진 공간이 되어버린 이곳이 복합문화예술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작년 새롭게 문을 연 해동문화예술촌이다. 주조장은 아카이빙관, 갤러리 등으로, 의원은 세미나실 및 국제예술레지던시로, 읍교회는 다목적 소공연장 형태로 운영된다.
해동문화예술촌에서 가장 많은 면적을 차지하는 곳은 바로 해동주조장이다. 1960년대부터 전통주를 생산하며 운영되었던 이곳은 산업구조의 변화로 결국 2010년에 공식적으로 운영이 중단되었고, 건물 대부분이 비워진 채로 새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2016년이 되어서야 폐산업시설재생사업에 선정돼 시범 운영되기 시작했고, 2019년 다시 ‘해동문화예술촌’으로 명명되면서 담양 지역의 대표 문화예술향유 공간으로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예술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기치로 시작된 공간의 변혁은 기존 공간이 가지고 있었던 전통을 예술적 접근을 통해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1960년대 중반만 해도 이곳은 담양읍 최고의 산업현장이었다. 전통방식으로 막걸리를 빚어내기 위해 이곳에서 많은 이들이 땀을 흘렸다.
하루의 피로를 막걸리로 달래던 시절, 해동주조장의 직원은 도시 곳곳을 누비며 막걸리를 배달하곤 했다. 해동문화예술촌 한 공간에 마련된 전시장에는 그 시절 배달에 사용된 자전거가 술동이를 가득 실은 채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그 시절의 풍경을 짐작게 한다.
붉은 벽돌과 양철지붕을 지닌 건물들은 현대적 감각의 인테리어와 다채로운 벽화들이 더해져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해낸다. 한때 담양을 대표했던 주조장답게 술과 관련된 즐길 거리가 공간 곳곳에 준비되어 있다. 옛 주조 공간을 그대로 활용한 원료가공실, 발효실, 제성실, 포장실을 따라 막걸리를 제조하는 과정을 배울 수 있다. 누룩을 보관하던 창고를 개조해 만든 기록관에서는 통유리로 된 바닥을 통해 술을 빚을 때 사용했던 우물을 들여다볼 수 있고, 주조 체험동에서는 우리나라 각 지역의 막걸리들과 함께 세계의 술을 만나볼 수 있다. 특히 ‘문학 속 술 이야기’ 전시는 오래도록 걸음을 붙잡아 둔다.
해동문화예술촌에서는 기획전시가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어린이들을 위한 예술공간으로 운영되는 소동동에서는 4월 25일부터 전시 ‘나, 너, 우리가’ 진행되고 있다. 소동동이 꾸려지고 난 후 진행되는 첫 주제전이다. 백상옥 작가가 참여해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 존중하며 살아가는 삶을 공유할 수 있도록 기획하였으며, 8월 16일까지 선보일 예정이다.

일터에서 쉼터로, 다시 소통의 공간으로 거듭난 정미소

담양의 먹자골목으로 불리는 국수거리. 그 마지막 구간에 정미다방이 있다. 이곳 역시 재생사업의 목적으로 담양군에서 폐업한 정미소를 사들인 후 새롭게 리모델링해 문화복합공간으로 탈바꿈한 공간이다.
기존 건물의 외관을 그대로 살려놓아 ‘천변정미소’라는 간판이 고스란히 남아 옛정취를 더한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지만 그 옛날 가을걷이를 끝낸 사람들은 이곳에 모여 방아를 찧고 정겨운 담소를 나누곤 했을 것이다. 이름은 정미다방으로, 곡물 냄새 대신 커피향 가득한 공간으로 바뀌었지만, 천장까지 남아있는 거대한 방아 시설들은 이곳이 정미소였음을 물씬 느끼게 한다. 한때 이곳을 꾸려갔을 이의 양곡가공업 등록증, 임도정 요율표 등이 그대로 벽에 걸려있어 공간의 깊이를 더한다. 정미다방은 마을 주민들의 쉼터이자 문화공간으로, 해금연주를 비롯한 다채로운 프로그램들이 진행되고 있다.
일상의 터전이었던 옛 공간들이 시간이 지나 재생의 옷을 입고 문화예술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그 옛 공간을 사용했던 사람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고, 버려진 시간 동안 낡아버린 세월의 깊이가 고스란히 오늘의 공간으로 이어진다. 공간은 추억과 현재를 교차시키고 미래를 잇는 하나의 소통이 된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고 난 뒤에 어쩌면 우리는 담양을 생각할 때 대나무 숲보다 먼저 이 공간들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