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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 그의 빛나는 시작(글 : 이경주 기자 / 서울신문, 사진 제공 : 한화이글스)
"19년간 마운드에 올라 '누구나 꿈꾸고 그 꿈을 위해 정진하면 결국에는 성취할 수 있다'는 진리를 증명한 한 야구선수에 대한 글이다."
1990년 초반, 야구로 꽤 이름난 서울 성남고에 다녔던 필자는 당시 최고의 투수들을 많이 기억하고 있다. 휘문고에는 임선동, 신일고에는 조성민, 광주일고 박재홍, 경기고 손경수, 성남고 강병규, 부산고 주형광 등이었다.
당시 공주고 역시 막강한 팀이었는데 손혁이나 노장진의 이름을 자주 보았던 기억이 난다. 박찬호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기자가 된 후 만났던 야구관계자들도 당시에는 강속구를 던지지만 제구력이 별 볼일 없던 투수로 기억했다. 하지만 국내에서 크게 평가받지 못하던 투수는 한국인 최초 메이저리거가 되어 동양인 최대 승수인 124승을 기록했다. 이 글은 박찬호 스스로가 말하듯 ‘대한민국의 시골 촌놈이 메이저리거가 된 이야기’다. 19년간 마운드에 올라, 누구나 꿈꾸고, 그 꿈을 위해 정진하면 결국에는 성취할 수 있다는 진리를 증명한 한 야구선수에 대한 글이다. 그래서 아직은 ‘반칙의 사회’에서 꼼수를 부리는 이들보다 우직하고 정직하게 매일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더 나은 내일이 열린다는 믿음에 대한 글이다.
- 1. 나를 믿어라, 꿈을 잃지 마라 - 사실 당시 고등학생 박찬호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박했다. 스포츠평론가인 기영노씨가 쓴 ‘야구가 기가 막혀!’에 잘 나와 있다. 당시에는 연고지 프로팀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박찬호는 당연히 충남 연고인 ‘빙그레’에 입단하게 돼 있었다. 하지만 공주고 박찬호의 경기를 지켜 본 빙그레 관계자들은 보고서에 다음과 같은 문구를 넣었다고 한다. “공은 엄청 빠르다. 최고 151㎞까지 나온다. 그런데 제구력이 좋지 않다. 박찬호가 던지는 빠른 공은 안치면 볼이다.” 결국 제구력은 형편없고 공만 빠르다는 평가를 받은 박찬호는 계약금으로 2000여만원을 제시받았다. 이미 좋은 선수들은 1억원 이상의 거금에 스카우트가 성사됐기 때문에 박찬호는 프로팀보다 한양대행을 선택했다. 절치부심을 거듭했지만 한양대에서도 제구력이 좋지 않은 박찬호에게 중책을 꾸준히 맡기지 못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1994년 1월 미국프로 야구 서부지역의 명문구단 LA 다저스가 한양대 2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찬호와 무려 120만 달러(당시 환율로 10억원 이상)에 입단계약을 했다는 소식은 전문가들도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다. 최고시속 155㎞를 웃도는 황금팔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다저스는 이미 좋은 투수로 성장한 선수를 고르는 대신 최고의 투수가 될 수 있는 ‘가능성 높은’ 선수를 영입했다. 박찬호가 택한 것 역시 ‘안정’ 대신 ‘가능성’이었다. 다른 이들의 스타일을 따라하는 것 대신, 무서울 정도의 자기 통제력을 바탕으로, 박찬호는 강속구를 주무기로 하는 투구 스타일을 지키며 향상시켰다.
- 2. 내일은 내일의 경기가 열린다. - 대한민국 최고의 메이저리거 박찬호의 야구 인생은 사실 순탄치 않았다. 오르막과 내리막의 반복이었다. 1994년 미국에 건너간 첫 해 박찬호는 역사상 18번째로 메이저리그에 직행한 특급 신인이었다. 하지만 프로야구를 경험한 적이 없는 박찬호는 2경기에서 뭇매를 맞은 뒤 17일 만에 마이너리그로 추락했다. 특급호텔에서 묵고 전세비행기를 타던 그는 구단버스를 타고 햄버거로 식사를 하며 12시간을 달려야 했다. 통역사도 없었던 시절, 그는 외로움과도 싸워야 했다. 하지만 이미 중고등학교 시절 남들의 차가운 시선에 대처하고, 스스로와의 싸움에서 이겨본 전력이 있던 박찬호였다. 4년 정도는 돼야 메이저리그로 복귀할 것이라는 주변의 예상을 깨고, 2년 만인 1996년 메이저리그로 돌아왔다. 박찬호가 2001년 시즌을 마치고 자유계약선수(FA)로 텍사스 레인저스와 5년간 무려 6500만달러를 받으며 계약을 할 때 성공의 고속도로가 열리는 듯 했다. 생애 최초 메이저리그 올스타로도 뽑혔다. 하지만 2002년 9승 8패에 그치면서 주춤한 박찬호는 이듬해 허리 부상의 여파로 고작 7경기에 나와 1승 3패를 거뒀다. 그리고 2004년도 4승 7패의 부진한 성적을 올려 '먹튀'라는 비난을 들었다. 곧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 옮긴 2005년 마침내 통산 100승 고지를 밟고 시즌 12승을 거두면서 부활했지만, 부상이 다시 찾아오면서 매해 팀을 옮겨야 했다. 누구나 박찬호의 선수생활이 끝났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7년 만에 돌아온 친정팀 다저스에서 본격적으로 중간 계투 보직을 맡았고, 평균 자책점 3.40의 좋은 성적 노모 히데오(통산 123승)를 제치고 메이저리그의 아시아 출신 선수 통산 최다승 기록을 새로 썼다. 17시즌을 뛰면서 최고의 성적을 냈던 박찬호는 마이너리그에서 힘들어하던 후배에게 이렇게 말했다. “투구 하나 하나에 최선을 다하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7회가 온다. 어제 잘 던진 공도, 어제의 패전도 기억하지 마라. 또 다시 하나의 공에 집중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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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2012년 6월 박찬호를 ‘아시아 기부왕 48인’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3. 아쉬운 마지막에 머물기보다 빛나는 시작을 준비하라 - 2012년 박찬호의 한국행은 분명 이슈거리였다. 사실 불혹의 박찬호가 전성기 때와 같은 성적을 보여줄 것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박찬호의 1승을 보며 외환위기(IMF)를 견뎌 낸 세대에게 그는 야구선수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한국 최초의 메이저리거로만 부르기에는 아쉬운 ‘정(情)’같은 것이다. 박찬호도 알았을까. 은퇴 기자회견에서 “1년 동안 충분히 목표를 이뤘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한국야구를 위해 어떤 일들을 해야 할지 계획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고 뼈있는 한 마디를 남겼다. 박찬호는 한화 이글스에 입단하면서 연봉 2400만원 전액을 유소년 야구 발전을 위해 쓰겠다고 밝혔다. 구단이 제시한 옵션 등 6억원도 야구발전기금에 기부했다. 이미 1997년 박찬호장학회를 설립, 15년간 300여명의 학생들을 지원해왔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2012년 6월 박찬호를 ‘아시아 기부왕 48인’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박찬호는 “많은 실패를 겪고 124승을 하기까지 배우고 얻는 것이 많았다. 시련 속에서 야구를 머리로 하지 않고 가슴으로 대하는 법을 배웠다. 포기하지 않는 도전과 진정한 사랑을 배웠다”고 말했다. 그리고 “끝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축하한다는 말이 듣고 싶다. 그래서 생을 마감할 때도 야구인으로서 축하한다는 말을 듣고 싶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겠다”고 말했다. 마흔, 박찬호는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