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우리나라 최초의 8,000m급 14좌를 완등한 산악인 엄홍길은 1997년 여성 동지였던 지현옥을 안나푸르나(8,901m)에 묻어야 했다. 지현옥은 한국 최초로 에베레스트에 오른 여성 산악인이었다. 세락(빙하의 붕괴로 빙하상에 생기는 얼음탑)이 무너져 수십 톤의 빙하가 무너지고 몇 차례의 눈사태를 무사히 통과했고, 그는 정상 등정 후 산 밑으로 내려가다가 뒤늦게 올라오던 지현옥을 만났다. "홍길이형, 정상이 어디야?"라고 힘겹게 묻던 그녀는 몇 분 후 실종됐다.
이후 박영석, 한왕용에 이어 지난 9월에 우리나라 4번째 14좌 완등에 성공한 김재수(50, 코오롱 스포츠)는 우리나라 최고의 여성 산악인으로 불리던 고미영을 산에 묻었다. 2009년 7월 파키스탄의 낭가파르바트(8,125m)는 그들에게 정상을 내주었지만 고미영은 캠프를 코앞에 둔 바위지대에서 실족해 추락사했다. 김재수는 그녀를 품고 등반을 계속했다. 혹은 계속하려 한다.



02 김재수라는 특출 나고 뛰어난 산악인을 소개하기 위해 엄홍길과 지현옥을 등장시킨 것은 정상에 오르는 행위가 숱한 어려움의 과정이기에 숭고하고 아름답다는 이야기로 이 글을 시작하기 위해서다. 혹은 큰 뜻을 이루는데 인생을 걸만한 계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텔레비전 중계든 신문기사든 혹은 자서전이든 정상에 오르는 환희를 마지막 장면에서 본다. 그 다음은 당연히 안전하게 내려오거니 하는 생각을 하는 걸까, 아니면 하산하는 길은 원래 훨씬 안전하고 편한가. 혹은 헬기나 무언가를 이용하여 편하게 내려오는 것일까, 정상이 목표이기 때문인가. 오르는 것은 의미 있어도 내려오는 것에는 관심두지 않는 인간사를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산은 단 1%의 과정이다. 하지만 오를 때와 마찬가지의 위험이 도처에 있고 탈진 상태이기 일쑤다. 제 발로 내려가는지, 중력에 정신없이 끌려가는지도 모른다. 1%가 99%를 망쳐버릴 수도 있다.
김재수는 고미영과 10개봉에 올랐고 고미영을 가슴에 품고 나머지 4개봉을 올랐다. 14좌 등반이라는 또 다른 하산을 했다. 한 동안은 기뻤다. 그리고 한 동안은 허탈했다. 그리고는 다시 짐을 챙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