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아, 새로운 지평을 열다
지난 7월 6일 남아공 더반에서 검은 정장의 김연아(21)가 단상에 올랐다. 전 세계의 눈이 집중된 것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한국 동계 스포츠 선수들은 올림픽 꿈을 이루기 위해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연습해야 합니다. 제 꿈은 제가 누렸던 기회를 새로운 지역의 재능 있는 선수들과 나누는 것입니다. 평창 2018은 이것을 도울 수 있습니다.”
프레젠테이션은 짧고 명확한 문장으로 채워졌다. 표정과 손동작마저 절제됐다.
“제가 ‘친애하는 IOC 위원 여러분, 제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다른 이들을 고취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신 것에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허락해주세요.”
투표를 위한 고요한 기다림이 지나고 ‘평창’은 1차 투표에서 역대 최다 득표를 했다. 기쁨의 환호성 사이로 김연아의 붉어진 눈시울이 보였다. 작은 소녀는 국가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환희와 탈진이 오가는 표정을 지었다. 본인도 직감했을지 모르지만 세계 최고의 피겨스케이팅 선수가 스포츠 외교관으로 성공적인 첫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김연아 신드롬
지난 7월 강원도 평창이 2018년 동계올림픽을 유치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이 누구냐는 설문조사에서 46.5%의 응답자가 김연아를 꼽았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19.5%), 이명박 대통령(18.6%), 조양호 평창유치위원회위원장(9.1%), 나승연 평창유치위 대변인(5.8%) 등이 뒤를 이었다.
김연아의 프레젠테이션은 애플의 스티브 잡스의 것처럼 영어 프레젠테이션의 교본이 됐다. 유창한 영어 실력도 중요하지만 단어 하나하나 상대방의 상황을 먼저 배려하는 선택이 눈을 끈다. 또 직접적인 표현보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스토리텔링’을 통해 평창이 동계올림픽을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까지 확산시킬 교두보가 될 것임을 표현했다. 단어로 뜻을 직접 전달하기 보다 영화를 보여주는 듯한 화법이 매력적이었다는 평가다.
무엇보다 ‘김연아 신드롬’의 핵심은 김연아 키드들의 탄생이다. 최고의 스케이터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운동에만 정진하던 아이들이 선수 출신 스포츠 외교관이라는 새로운 꿈을 꾸게 됐다. 지덕체(智德體)를 고루 갖춘 ‘2세대 김연아’가 쏟아져 나올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연아의 힘
김연아의 프레젠테이션이 끝나고 충북도립대학교 생체신호분석연구실 조동욱(53)교수는 그의 목소리를 분석하는 연구를 진행했다. 음성 분석 프로그램 프라트(Praat)에 넣어본 결과, ‘김연아는 처음엔 238.047 Hz의 피치를 보이다가, 마지막 부분에선 257.049 Hz로 변화를 보였다’면서 이는 ‘호소력과 감정이 넘치는 목소리를 구사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물론 부단한 노력의 결과였다. 그의 집중력과 노력은 더반에서도 힘을 발휘했다. 김연아는 빙판에서도 될 때까지 연습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전 코치였던 오서는 ‘연아의 재능을 하늘에서 준 축복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연아의 연습과정을 딱 사흘만 보라고 말해주고 싶다’면서 ‘연아의 유일한 결점은 가끔 지나치게 연습을 하는 완벽주의’라고 말한 바 있다. 		 
김연아는 여느 선수들이 경기의 중압감을 못 이겨 받게 되는 심리치료를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경기 중에 점프에서 실수를 하더라도 금방 털고 경기에 집중한다. 그만큼 집중력이 뛰어나다는 의미다.
프레젠테이션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부은 김연아는 탈진으로 귀국 환영행사에는 참석조차 못했다. 그는 평창의 유치가 확정되고 나서 “올림픽 경기에 나서는 것은 개인적인 일이라 크게 부담되지 않았지만 유치활동 과정에서는 내 실수로 큰일을 망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큰 부담감을 느꼈다.”고 털어놓았다. 특히 온 나라가 자신의 어깨에 걸려 있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며칠 후 일어나 특유의 웃음을 지었다. 진정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즐기는 것 외에 끊임없는 고통도 수반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연아의 미래
동시대 인물이 아니어서 빙판에서는 경쟁하지 않았던 김연아와 카타리나 비트(독일)는 스포츠 외교관으로서 만났다. 김연아가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228.56점이라는 경이적인 점수로 우승을 차지할 때, 많은 이들은 ‘전설’ 카타리나 비트를 떠올렸다. 무대 장악력과 기술과 예술성 등 3박자를 동시에 갖춘 것이 공통점이었다.
두 스포츠 외교관은 서로를 존중했지만 현재의 연아는 과거의 비트를 넘어섰다. 평창이 내건 슬로건처럼 김연아는 ‘새로운 지평’이었다. 오랜 동계올림픽을 두 번이나 재패했던 노련한 스포츠 외교관은 독일의 패배가 확정된 후 눈물을 보였다. 그러나 겨울 스포츠의 저개발 지역으로 분류되는 환경에서 동계올림픽의 꽃으로 피어난 김연아는 불모지에 꿈을 주는 희망 전도사로서 평창의 꿈을 이루게 했다.
사실 IOC규정에 의하면 김연아는 본인이 원할 경우 2014년 소치동계올림픽 참가여부에 관계 없이 선수자격 IOC위원 후보다. 피겨 선수로서의 인기, 명성을 고려하면 이미 2014년 선수자격 IOC위원 당선확률 1순위에 육박한다. 또 김연아가 2014년에 선수자격 IOC위원이 될 경우 동계올림픽 피겨 금메달리스트로서는 최초가 된다. 이런 주위의 이야기에 대해 김연아는 뭐라고 대답할까.
“많은 분들이 나중에 IOC위원이 되어야한다고 말해 주시지만 그런 것까지 생각하기엔 너무 어리지 않나 싶어요. 선수 생활을 마친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까지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하지만 이미 ‘국보소녀’의 새로운 세상은 열렸다. 대한민국 동계스포츠가 나갈 새로운 지평의 문도 이제 막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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