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미술시간.
“자 최근에 부모님과 여행한 곳을 그려보세요.”
책상위의 준비물을 확인한 선생님은 미술시간의 시작을 알렸다. 하지만 평소 그리기를 좋아했던 나의 조카 진서는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최근에 부모님과 함께 여행간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녀석 참 밝고 씩씩한 것이 삼촌을 닮았다. 생각하고 생각하다 엄마와 함께 간 집 앞 미용실을 참 잘도 그려왔다.
“삼촌 이거 봐, 내가 그린거야. 응 이건 미용실 아줌마, 이건…….”
진서를 보고 있자니 나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서해안 바닷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에게 여행은 늘 꿈만 같은 이야기였다. 아니 농사일을 하는 부모님을 둔 우리 모두에게 여행은 낯선 그 무엇이었다. 그 시절 방학이 끝나면 선생님은 늘 방학동안 여행한 사람이 있으면 손들어보라고 하셨다. 그러면 몇몇 학생이 손을 들고 자랑하듯이 바깥 세상(?)의 신비로움을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TV에서만 보던 기차를 고등학생이 돼서야 처음 타봤으니 그 시절 우리에게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건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았다.
항상 밝게 자라주는 모습이 마냥 귀여운 조카였는데, 내가 경험한 무료한 방학을 되풀이 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무작정 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삼촌인데 방학에 삼촌 집에 놀러와. 삼촌이 놀이공원 놀러 가줄게. 대신 이번 기말고사 잘 봐야 한다.” 평소 ‘세상에는 공짜 점심은 없다’고 가르쳤기에 기말고사 성적표를 꼭 가져오라고 했다. 놀이공원에 가게 됐다며 즐거워하는 진서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전해졌다.
그렇게 도착한 놀이공원. 진서는 신이 나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보는 것마다 먹고 싶고, 놀고 싶은 진서. 임신해 몸이 무거운 아내는 우리 둘을 놀이기구에 태우고는 뜨거운 태양아래 몇 시간씩 기다리는 수고를 했다. 나 또한 오랜만에 타는 놀이기구에 혼을 빼앗기며 현기증을 이겨내야만 했다. 하지만, 조카의 방학에 소중한 추억하나 만들어준 하루, 고생보다는 기쁨이 더더욱 큰 날이었다.

오색 청명한 가을의 발걸음
구슬땀을 흘리며 오르는
깊고 긴 계곡에
저 단풍 곱게 물들어 있고
태초의 고요함으로
꽃수 놓은 병풍처럼 드리워져
단풍잎 위에 내 마음
사뿐사뿐 걸어가누나

가을이여
산이여
저 높은 산마루엔
나뭇가지 앙상하고
긴 오솔길을 따라
사박사박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
낙엽 밟는 소리
온 몸에 전해오는 저릿한 가을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