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케빈 컨. 그의 서정적인 피아노 선율은 드라마 <가을동화>에 OST로 삽입되면서 국내에서도 큰 사랑을 받았다. 춤추듯 자유롭게 건반을 두드리지만, 사실 그는 시각장애인이다. 내한공연을 앞두고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건반이 정확히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건반을 보고 치는 것이 아니니까 괜찮다”고 말했다.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자신의 재능을 표현할 수 있는 통로가 있고, 전세계 수많은 팬들과 음악에 대한 애정을 교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현실 속에서 소통이라는 말은 장애인에게 낯선 단어다. 복지 시스템은 장애인의 사회 활동을 지원하기에 충분치 않고, 비장애인들은 장애인을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장애에 대한 편견은 만성적이다. 3년 전 대한장애인체육회 산하의 한 종목 단체 회장과 인터뷰를 할 때였다. 장애인 선수들이 집행부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고 있었고, 회장은 “장애인들이 마음에 병이 많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소외받는다거나 무시당한다는 생각이 들면 필요 이상으로 화를 내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장애인들의 주장을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이들의 억지’ 정도로 폄하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었다. 대화에 임하는 기본적인 마음가짐이 이렇다면 정상적인 소통을 기대하긴 힘들 것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는 인간을 움직이는 다섯 가지 기본 욕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 바 있다. 생리적인 욕구, 안전에 대한 욕구, 소속감과 애정에 대한 욕구, 인정과 존경을 받고자 하는 욕구, 마지막이 자아실현의 욕구다. 문제는 장애인이 이런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통로가 비장애인에 비해 현격히 적다는 점이다.
사회관계와 자아실현의 욕구를 해소한다는 측면에서 케빈 컨에게 피아노가 그랬듯 스포츠는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운동을 못하는 게 아니다. 대부분의 비장애인 올림픽 종목에 시각 장애인들도 도전하고 있다. 시각장애인 스포츠에선 특히 파트너와의 호흡과 소통이 경기력을 판가름한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시각장애인 사이클(텐덤사이클)이다. 2인용 자전거 앞에 비장애 선수가 앉아서 핸들을 조정하고 뒤에 장애 선수가 앉는다. 페달링은 두 선수가 함께 한다. 언뜻 보기엔 비장애 선수의 기량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한국시각장애인스포츠연맹의 김홍진 국장은 “경기력에 가장 중요한 건 두 선수가 정확하게 타이밍을 맞춰 페달링을 해야 한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시각 장애인 볼링은 비교적 보급이 잘 된 종목 중 하나. 시각 장애인 볼링은 투구 방향을 가늠할 수 있게 가이드레일이 설치돼 있다. 왼손으로 레일을 잡은 채 오른손으로 투구를 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비장애인의 역할이 중요하다. 김홍진 국장은 “비장애인은 볼이 굴러간 방향을 모니터링 해주고, 쓰러진 핀과 남아있는 핀의 번호와 위치를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고 덧붙였다. 2010년 광저우 장애인아시안게임 텐핀볼링 TPB1(전맹) 개인전에서 금메달을 딴 김정훈 씨는 이런 말을 했다. “전맹은 레저로 즐길 수 있는 것이 많이 없는데 나는 볼링을 하면서 자아실현을 하고 도전정신을 발휘할 수 있었다.”
마라톤에 도전하는 시각장애인도 있다. 그들을 도와 함께 뛰는 비장애인을 가이드 러너라 부른다. 봉사 단체인 해피레그의 김용열 씨도 대표적인 가이드 러너 중 한 사람. 그는 “마라톤은 시각 장애인이 정안인(시각 장애인과의 반대 개념으로 부르는 말)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스포츠는 이념과 종교, 인종과 국경을 초월한다. 장애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김용열 씨는 시각장애인 마라토너 이용술 씨와 함께 달렸던 첫 경험을 이렇게 기억한다. “마라톤 대회장에서 우연히 그를 만났다. 원래 같이 뛰어주기로 했던 도우미가 나오지 않아서 참가를 못하고 있더라. 내가 대신 함께 뛰어드리겠다고 했다. 근데 원래 이 분이 나보다 15분 정도 기록이 더 좋았다. 그래도 함께 뛰어야 하니까 속도를 나에게 맞춰주더라. 미안한 일이었다. 하지만, 완주 자체가 목표였으니까 둘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레이스였다.”

하나의 목표를 공유하고, 함께 땀을 흘린다는 것. 장애와 비장애의 벽을 넘어 스포츠를 통해서만 이 느낄 수 있는 소통과 감동의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