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아버지가 이사를 하셨다. 새 집은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사촌동생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외할아버지 댁은 새로 지은 아파트라서 그런지 모든 생활을 관리할 수 있는 전자시스템이 있어 누나와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것저것 작동해 보기 바빴다. 그러다가 둘러보니 새로운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벽 가득한 최신형 텔레비전이 먼저 눈에 띄었고 예전보다 근사해진 에어컨도 번쩍 거리면서 시원한 바람을 내보내고 있었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외할아버지께서는 이제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으시는데, 어떻게 새 살림살이들을 사실 수 있었는지 말이다. 그래서 난 여쭈어 보았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이제 더 이상 은행에 다니지 않잖아요. 그런데 새 TV랑 그런 것들을 어떻게 사셨어요?”
“그건 말이지, 할아버지가 젊었을 때 열심히 저축을 했기 때문이란다. 또 달마다 국민연금도 나오는 걸.”
“국민연금이요? 그게 뭐에요? 저는 처음 들어보는데.”
“아, 우리 상원이가 아직 국민연금이 뭔지 모르는구나.”
그러자 옆에서 듣고 계시던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국민연금은 젊었을 때 가입을 해두었다가 할아버지처럼 연세가 드시면 돈을 받게 되는 것이란다.”
“오, 그럼 공짜로 돈을 줘요?”
“야,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누나가 끼어들어 면박을 주는 바람에 나는 조금 무안해졌다.
“누나 말이 맞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야. 쉽게 생각하자면, 미리 미리 적금을 들어 둔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야.”
외할아버지께서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아, 적금! 저도 알아요. 돈을 조금씩 모아두었다가 나중에 큰돈으로 찾을 수 있는 것, 맞죠?”
“그래 잘 알고 있구나. 국민연금은 적금과 마찬가지야. 사람들이 젊어서 돈을 벌 수 있을 때 매달 조금씩 돈을 저금해서 본인도 받고, 오래 사는 노인들도 그 돈을 나누어 받게 된단다.”
“그럼 나중에는요? 자기가 저축한 돈을 현재 노인들에게 나누어주면 나중에 자기 몫이 줄어들잖아요.”
“내가 노인이 되어서는 그때 젊은이들이 저금한 돈으로 받게 되는 거지.”
“아 그럼 계속 고리처럼 연결이 되는 거네요. 지금 젊은 사람들이 노인들을 돕고, 나중에 노인이 되면 또 그때 젊은 사람들이 돕고......”
“그래 잘 알고 있구나. 고리처럼 맞다. 우리 상원이 참 똑똑한 걸.”외할아버지께 칭찬을 듣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생각해보니 별로 어려운 얘기도 아니었다. 마치 반에서 나의 마니또가 나에게 관심을 주고, 나는 또 다른 나의 마니또에게 도움을 주는 것처럼. 사람들이 결국엔 하나의 고리로 연결되어 서로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 것. 그게 국민연금이라는 것이었구나.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 돌려받는다는 것, 그것뿐 아닌가? 그러고보니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작년 겨울에 입었던 외투 주머니 속에서 어느 날 갑자기 비상금을 발견했을 때의 즐거움.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횡재한 듯한 그 기쁨! 국민연금이란 것도 마치 그런 느낌이 아닐까?
외할아버지께서는 평생 다니시던 은행에서 퇴직하신 후 남다른 취미도 갖게 되셨다. 그건 바로 사진을 배우신 것이다. 가끔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전시회도 다녀오시고 멋진 풍경을 찍으러 여행을 떠나기도 하신다. 작은 야생화를 찾아 산을 오르시면서, 또 이른 아침 떠오르는 해를 카메라에 담으시면서 외할아버지는 예전보다도 더 건강해진 것 같다고 하신다. 물론 나와 누나는 외할아버지의 단골 모델이다. 멋진 포즈를취해보이는 우리만큼이나 외할아버지께서는 즐거워하신다. 그렇지만 혹시 이것도 연금의 덕분인가?
누나와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외할아버지에게 찾아온 작은 기쁨, 우리 아버지도 나도 언젠가는 똑같이 느껴볼 수 있겠지? 왠지 두둑한 보너스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느낌이다. 연금아, 부디 줄어들지 말고 점점 큰 기쁨의 고리를 만들어다오. 너만 믿는다.